• 최종편집 2025-03-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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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은 인간의 본성으로 보인다. 우리는 자랑하고 자랑하고 싶어한다. 자랑 자체가 악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도 자랑 자체를 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7)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경문자주의적 경향 때문에 그 말씀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랑하라’로 간주한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자랑거리를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포장하여 자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명령인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우리의 오해와 상당히 다른 내용을 의미한다. 사실상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인용구절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장 31절은 “기록된 바”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4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하라”의 인용이다. 바울은 “이것으로”를 “주 안에서”로 바꾸어 인용한다. 문제는 “주 안에서”라는 번역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는 번역은 “주를 자랑하라!”로 번역되어야 하는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만일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번역이 옳다면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 자랑하지 말라!”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 안에서”로 번역하지 않고 “사람을”로 번역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의 금지명령을 보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여기서도 모두 ‘지혜 안에서’, ‘용맹 안에서’, ‘부함 안에서’라고 번역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지혜를”, “용맹을”, “부함을”은 모두 ‘안에서’를 의미하는 헬라어 전치사 ‘엔’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동사의 목적어로 번역한다. 성경의 헬라어 구조를 살펴보면 동사 ‘자랑하다’와 전치사 ‘엔’ 구절의 문장은 일관성 있게 ‘~을 자랑하다’로 이해하고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그것을 “주 안에서”라고 번역했을까? 아마도 ‘안에서’를 의미하는 전치사 ‘인’을 가진 서구 언어의 번역 영향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폐일언하고 잘 알려진 고린도전후서의 말씀,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번역은 이제부터라도 “주를 자랑하라!”라고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이고도 최고의 자랑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 당시 자랑거리는커녕 최악의 비난거리였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거리끼는 것”이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이고, “미련한 것”이란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책 제목 <우신예찬>에 사용한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 칭송>을 <우신예찬>이라 멋지게 번역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자랑거리와 질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자랑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결과중심적이다. 그 내용의 대부분은 가시적 성공과 이에 따르는 부귀영화가 일반적인 자랑거리로 채워진다. 세상의 자랑거리로 보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대상일뿐이다. 최악의 형벌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떠벌리는 일은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랑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성공과 부귀영화인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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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우 교수] 그리스도인의 자랑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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