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입니까?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라는 말 이래로 비슷한 표현이 많았지만 요즘도 신조어들이 등장합니다. ‘호모 엠파티쿠스’(제레미 리프킨, 공감하는 인간)나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하찮은)를 비롯해서 ‘호모 큐라스’(고미숙, 돌보는 사람), ‘호모 디스컨텐트’(선봉란, 불만의), ‘호모 데지그난스’(지상현, 디자인하는), ‘호모 듀비탄스’(박규철, 의심하는), ‘호모 비아토르’(문요한, 여행하는)가 그러합니다. 최근에는 “호모 피델리스”(한민, 저녁달, 2024)가 나타났습니다. 저자는 그 의미를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풀었습니다. 원래 의미의 ‘숭배’는 신(神)을 전제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도 서문을 제목부터 “종교는 인생의 화두였다”로 정하고 “종교는 헤아릴 수 없는 옛날부터 인간과 함께 해 왔다”라는 문장으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저작물의 탄생 배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최근의 상황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지금 인류는 무엇을 숭배하고 있을까요?
첫째, ‘유사영웅’(pseudo-hero)을 숭배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나요, 하지만 최근에는 여기저기서 유사영웅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추종자들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전광훈이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쪽 지방에서도 다른 목사 하나가 뜨면서 이런 흐름에 편승했는데, 마찬가지로 담임하는 교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최근에는 역사를 가르쳐서 유명해진 일타강사가 정치판에 혜성처럼 합류하여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중입니다. 이들을 유사영웅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이들의 존재감이 객관적인 업적 평가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주관적이면서 신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돌발적인 추앙(推仰)에 터를 잡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신문의 사진에 주로 나타나는 유형 역시 중요한 면일수록 역사의 주인공 같아 보이는 사람이 차지하는데 이 논문의 저자들도 이를 일종의 ‘신화’로 간주하고 ‘유사영웅’이라 불렀습니다(임영호·김보영·최수정, “신문사진에 나타난 신화의 유형”). ‘유사영웅’이라도 그들을 둘러싼 지지자들의 열광을 어떻게든 해석하려다 보니 “호모 피델리스”라는 말까지 등장했던 것입니다.
둘째, 운명을 숭배합니다. 현재 가장 급증하는 종교는 ‘무종교’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미국도 지난 50년 간 무종교인 비율이 5%에서 30%로 증가했다지요?(Pew Research Center, 2024). 한국도 201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56.1%였고 나이가 어릴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추세를 보입니다. 반면에 무속인은 늘어나고 점집이나 인터넷으로 운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들은 사람이나 귀신보다는 운명을 숭배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당이나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자기 운명이 궁금한 자들입니다. 현대는 바야흐로 ‘탈종교시대’ 내지 ‘후종교시대’라고 해야 하지만 동시에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넘쳐납니다. 새로운 사업이 잘 될지,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될지, 언제쯤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지 등 운명을 향한 수요는 다양합니다. 대중들을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운명을 원망하지 말라’ 했고, 니체는 한술 더해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르 파티)를 남길 정도였으니 운명에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었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운명은 무(無)다’(불안의 개념, 임춘갑 역)를 외쳤습니다. 운명은 무언가 실제(實際)인듯 말하지만 실재(實在)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라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허상입니다.
셋째, 자신을 숭배합니다. 운명론자의 반대편에 현대판 나르시스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자율성을 강조하며 자유의지를 절대시하면서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자들입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였습니다.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일찍 간파했듯이, ‘공관복음’이나 ‘제4복음’이 아니라 ‘내가복음’을 선호하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수년 전 바이올라 대학의 윌리엄스 교수(조직신학)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빨리 번지는 종교는 ‘자기숭배’(Self-Worship)고 미국인 84%가 ‘자신을 즐기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목표’라면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번은 이제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기를 즐거워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는 자조 섞인 분석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TGC 칼럼). 상기한 첫째와 둘째 역시 자기숭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중요하니 자기 운명을 알고 싶어 하고, 자기가 중요하니 자타가 신격화를 즐깁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숭배를 부추긴다.”(키르케고르) 우리는 다른 무엇을 숭배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신자들이여, 부디 그리스도만을 숭배하는 인간인 ‘호모 피델리스 크리스티’(Homo Fidelis Christi)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