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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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 중인 민주노총 조직국장이 북한 공작금 수수혐의 등으로 재판받는 모 목사와 10여 차례 통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 모 목사는 북한공작원 리광진과 접촉했는데, 2015년 4월 쿠알라룸프르에서 미화 1만8900달러의 공작금을 받았고, 또 다른 B목사와 함께 북한 공작원과 회합, 통신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선전한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문제는 목사들 가운데서도 3대 세습 독재정권을 찬양하고 공작금을 수수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B목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5년 12월 기소되어 2017년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앞의 모 목사는 북한 공작금 관련 기소가 늦어져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조선일보」 2023. 1. 25). 이와 같은 기독교계의 공산주의자는 일제하에서부터 있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 난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도 적지 않았다. 남로당을 지지하거나 남로당원으로 활동한 경우가 그것이다. 해방 이후 남로당의 파괴 공작은 엄청났다. 1946년의 대구 철도의 10월 항쟁, 1947년 3월 제주도4.3사건, 1948년 8월의 여수14연대 반란사건 등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박헌영은 신변위협 때문에 황해도 해주로 가서 은거하였고, 지령으로 이런 사건을 조종했다. 이 조종을 받아 남한에서 이 사건을 수행한 이가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李載馥, 1903-1949)이었다. 그런데 그는, 민경배 교수에 의하면,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출신의 목사였다. 그는 이재봉(李再鳳)이라는 이름으로 평양신학교를 34회로 졸업한 목사였다.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마산 재건교회 지도자 주상수, 반공목사 박병훈과 동기였다. 박윤식에 의하면, 이재복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 597번지에서 이유업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하던 중 도일하여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공부했다. 도시샤라는 교명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만든 결사체’라는 뜻인데, 이 학교의 교훈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였다. 정대위 윤성범 김태묵 서남동 등 많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공부했고, 시인 윤동주나 정지용도 이 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재복의 수학 기간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비슷한 시기 공부한 한국인들과 교우했을 것이다. 1943년에는 평양 출신 공지길을 만나 혼인했다. 공지길은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가 교토에서 산파 공부를 하던 중 이재복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체류하던 이재복은 해방을 앞두고 귀국하여 영천읍내의 영천교회(지금의 영천제일교회)에서 8개월 간(1945. 2.15-10.14)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후 좌익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인민당에 입당하였고, 경북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을 거쳐 군사부장에 오르게 된다. 박헌영(1900~1956)의 신임을 받은 것이다. 대구 10.1폭동 이후에는 주동자로 지목되어 지하로 잠적했고, 이후 제주4.3 사건, 여수 14연대(반란)사건까지 주도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49년 12월 18일 새벽 3시경 김창룡 대위 이하 3명에 의해 서울 성동구 신당동 377번지에서 체포되었다. 이곳은 그의 세 번째 부인 집이었다. 당시 남로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은신처 확보를 위해 본 부인 외에도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또 이재복은 박영근(朴永根), 오일서(吳一緖), 이근민(李根民), 이일도(李一道) 등과 같은 가명을 사용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런 가명이나 은폐가 이재복의 굴절된 삶의 방식을 반영한다. 여기서도 좌파 혹은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을 보여준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거짓, 기만, 은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가정을 파괴하거나 가족관계까지 정략적으로 이용한다. 김창룡은 그에게 전향할 것을 요구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을 이렇게 많이 죽였는데, 살아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겠느냐”며 끝내 전향을 거부하였고, 1949년 5월 26일 서울 인근 수색에서 총살당했다. 김창룡은 이재복이 전직 목사인 점을 감안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라. 남한의 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당신이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는 것이다”라고 설득하자 일주일간 버티던 그는 500여 명의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의 명단 제공에 의해 군 내부의 공산당원 제거로 6.25 전쟁 초기에 군부 내의 봉기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남침한 김일성의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삼일동안 서울에 체류한 것은 봉기를 기대한 것이었으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삼일이 남한과 유엔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호기가 된 것이다. 봉기의 불발로 격분한 김일성은 결국 박헌영을 언더우드와 접선한 미제 간첩으로 몰아 총살한 것이다. 이때가 1956년 7월 19일이었다. 이때 감리교의 현순(玄楯) 목사 딸 현 엘리스는 박헌영의 애인으로 북한 외무성에 근무했으나 박헌영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어떻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재복이 좌익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그의 내면에 기독교와 공산주의, 양자의 충돌이 없었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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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좌파 공산주의자가 된 이재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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