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나 배는 나침반이 있어 좌표를 정하고 나아가듯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침반이 되어 삶의 좌표를 정하고 나아간다. 그럼에도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면 기상예보와는 다른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나고 그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경험하는 자의 몫이다.
나에게도 바람과 풍랑이 밀려와 내 삶이 곤두박질할 것 같은 힘든 시간이 흐르는 때가 있었다.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가운데 나의 삶을 헤집고 나의 사역을 송두리째 흐트러트리려는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절박한 마음은 걸레처럼 짓이겨진 상황에서도 말씀이 나침반이 되어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어느 날이었다. 우연하게도 영화 한 편을 관람했다. <Do You Believe?> 120분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얼굴을 감싸고 숨을 몰아쉬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나의 오늘을 대변이라도 하듯 한 내용은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침반이 되었다.
살아가노라면 항상 ‘Why?’라는 질문을 한다. 너나없이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연속이다. ‘Do You Believe?’의 내용도 그랬다. ‘매튜’목사는 우연히 길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 남자가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믿는다”라고 대답을 하는데 그 남자는 다시 한마디 던진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매튜’목사는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삶의 좌표를 잃은 열두 명의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가 엮어지는 삶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믿음 생활을 잘하면서 손해를 보기도 하고,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모욕을 당하고, 좌절과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갈등하면서 Why? 라고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점차 십자가의 능력을 깨닫게 되고, 행동하는 믿음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의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물처럼 흘러 젖어 들고 작은 나무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은 우리 인생 여정에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한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요셉을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바울 사도를 통하여 Why에 대한 답을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깨닫고 실천하면서 살아 가지만 막상 내 삶의 여정에 Why? 라는 상황에 부딪히면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놓치기 쉽다. 결국 믿음의 눈을 열고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작품 전부를 보게 되면서 너나없이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영화가 마무리되면서 OST가 흐르는 가운데 화면을 채우는 글은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게 하고 마음을 추스르게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전해진다.
<인간은 이 세상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우리 인간은 바닥에서 노는 아이 같고 기껏해야 벽걸이 한쪽 면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그 한쪽은 때로는 지저분하고 색이나 디자인이 영 어색해 보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바닥에서 일어나 벽걸이 뒷면도 보게 될 것인데 그때는 주님의 놀라운 작품 전체가 확실히 보일 것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십자가도 그때 확실히 볼 것입니다. 그 거대한 벽걸이 뒷면에서 독특한 실 한 줄이 눈에 뛸 것입니다. 디자인도 색도 특이한데 그 한 가닥이 각 사람의 삶입니다. 이 실이 가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한 가닥이라도 빠지면 작품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 그분의 큰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Do You Believe?>
나는 온갖 희비의 삶 중심에서 나름 혜안(慧眼)과 영안(靈眼)과 심안(心眼)을 열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는 줄 알았는데 멈추어 돌아보면 어린아이처럼 내 삶의 좁은 방바닥 같은 영역에서 놀면서 기껏해야 내가 바라보는 벽걸이 한쪽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벽걸이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은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데 나는 ‘Do You Believe?’에 진실로 ‘아멘' 할 수 있는가? 만감이 교차하였다.
대형 교회 당회장의 현실이 행복지수보다는 불편 지수가 높아져 가면서 한쪽 벽걸이만 보는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나 자신이 싫어지면서 벽걸이 너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앞뒤 계산 없이 조기 은퇴를 선언하고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작품의 앞면만 아니라 뒷면까지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영역을 보다 가까이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Do You Believe?’를 물었다. 하나같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한쪽 벽걸이를 보면서 그 작품의 전부를 다 본 듯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본다. 이런 사람들은 내 생각이 기준이 되어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공동체를 카오스 현상으로 만들어간다. 예컨대 교회 생활에서 새벽기도, 헌금, 주초문제 등은 특징이지 본질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믿음의 척도에 기준이 되어 버렸고, 섬김의 본질인 직분이 자신도 모르게 계급개념으로 둔갑하여 직무수행의 더 본질적인 상대방을 존중하고 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가 아름다움이 연주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추함은(醜) 술병을 들고 가면을 쓰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헛소리하는 것을 뜻한다. 답지 못한 행태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에 대한 자괴감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나 벽걸이 뒷면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뜬 사람은 뒤엉켜 있는 듯한 각양각색의 수많은 실들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 가운데 한 줄임을 자각하면서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간다.
‘Do You Believe?’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