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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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에 교회에서 연로하신 담임 전도사님과 장로님과 예배당 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장로님이 말없이 내 몸을 옆으로 밀어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내고 전도사님이 사택으로 들어가신 후 장로님이 제 손을 잡고 조용히 건네주시는 말씀을 하셨다. “서 선생,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돼. 따라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내가 전도사님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것을 보신 장로님이 일깨워 주신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른 공경에 대한 마음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 그림자를 따르는 것은 좋지만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되는 교훈은 목회 사역에서는 물론 내 실존의 의미와 삶에도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오래전 프랑스 작가 ‘아델베르트 폰 사미소’(Chamisso Adelbert von)의 ‘피터 술래밀의 놀라운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최문규 옮김;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읽었다. 슐레밀은 가난한 청년으로서 하루는 어두컴컴한 부둣가를 거닐다가 이상한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무슨 물건이든지 다 끄집어낼 수 있는 신비한 주머니를 슐레밀에게 내밀면서 슐레밀의 그림자와 바꾸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가난하게 생활하던 슐레밀은 별생각도 없이 자신의 그림자를 그 신비한 주머니와 바꾸게 된다. 순간 그 사나이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그 주머니를 건네주고 슐레밀의 그림자를 아주 익숙한 솜씨로 돌돌 말아 자루에 넣고 사라져 버렸다. 그 사나이는 악마였다.

 

그림자를 주머니와 바꾼 슐레밀은 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의 의혹을 받게 되고 놀림을 당하고 곤욕을 치르게 되면서 점점 주위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자기 방에 들어앉아 혼자가 된다. 밤에는 사십 자루의 초를 방 전체에 켜놓고도 마음이 편치 않아 불안하고 초조함으로 밤을 지새우게 된다. 사랑하던 여인과도 그림자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 헤어지게 되고 실연의 쓰라림을 경험해야 했다. 주머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낼지라도 이미 그 주머니는 삶의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었다.

 

슐레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자신의 그림자를 되찾으려 하지만 악마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이번에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슐레밀의 영혼을 요구한다.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와 바꾼 신비한 주머니를 던져버리고 광산으로 들어가 고된 일을 하면서 번민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가 결국 말년에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친구 사밋소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죽는다.

 

“친구, 사람들 틈에서 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사랑해야 하네.”

 

그림자란 직접 접촉할 수 없지만, 인간 본연의 소유물임을 교훈한다. 있을 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아도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을 하찮게 여기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것을 일깨운다. 그것은 국가, 가족일 수 있고 신앙이며 양심이며 명분일 수도 있다. 비록 그림자는 팔았지만 자신의 근본인 영혼은 팔지않고 자유로운 삶을 택했던 주인공을 통해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슐레밀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당장 눈앞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그림자를 팔아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어쩌면 에서에게 있어서 장자라는 명분쯤은 지금 당장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고 그래서 눈앞의 팥죽 한 그릇이 더욱 소중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렸다.

 

눈앞의 팥죽보다는 명분과 가치를 존중했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히 여겨 팥죽 한 그릇을 기꺼이 에서에게 건네 줄 수 있었으며 그것은 야곱의 일생을 결정하는 축복의 계기가 되었다.

 

삼손이 ‘나실인’의 명분을 들릴라의 무릎보다 간과하였고, 발람이 모압왕이 제공하는 ‘물질적인 삯’을 예언자의 명분보다 귀히 여겼고, 고라의 권력욕이 역할의 명분을 패역으로 몰락시켰고, 가룟 유다는 지고한 예수 제자의 명분을 은 30과 바꾸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준엄하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얼마나 소름 돋는 말씀인가. 그림자의 소중한 이치를 모르는 열매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 같은 삶을 그림처럼 그려내는 교훈이다.

 

여의도 1번지의 선량(選良)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림자의 교훈을 생각한다. 국회의원이라는 존귀한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과 당리적인 이해타산에 팔아버리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지고한 정치철학을 짓밟고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국민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오늘의 모습이다.

 

어디 그뿐이랴. 은퇴 이후 한주도 쉼 없이 전국 방방곡곡 세계 여러 나라 초청을 받고 말씀 사역을 하는 동안 보이고 들리고 경험하는 일상에서 유다서에 기록된 경고메시지를 간과하고 명분보다는 실리(實利)에 낭패스러운 삶을 연주하는 지도자들의 행태는 주님의 아픔이기 전에 공동체의 슬픔이 되기도 한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직분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사명이며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다. 그 명분을 개인적인 소욕에 더럽히고 그 명분을 이해타산에 팔아버리면서 주님의 교회를 카오스 현상으로 만들어 간다면 그것이 유다서에 경고한 주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나의 열매가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비록 그림자일지라도 주의 종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장로님의 가르침이 새삼 생각난다. 아프고 벅찬 삶의 여정에서도 ‘목사’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 가히 몸부림하면서 눈앞의 이익보다는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면서 내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그를 실증하는 삶을 엮어내는 삶을 살아가면서 오늘도 그림자의 교훈을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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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그림자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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