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스웨덴 아카데미는 한국의 한강 작가를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비할 바 없는 영예겠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성으로서도 최초요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이라는 점 등 여러 가지 기록을 갈아치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모습에서 무척 닮아 있습니다.
첫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진리를 재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수상자로서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명장 마틴 스콜세지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에게서 배웠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대단한 환호가 쏟아졌고 평단의 찬사가 이어졌지만 정작 스콜세지 감독은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한 적은 없다지요? 대신 로랑 티라르가 쓴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에는 “영화의 관점이 명확하고 개인적일수록 그 영화의 예술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는 스콜세지의 말이 실렸다고는 합니다(조준형, 연합뉴스, 2020. 2. 11).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은 한국의 작은 일상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한국 고유의 풍자와 해학을 가미했는데도 세계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한강이 다루는 글들도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많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다수인데도 세계사적이고 보편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개인적이지만 예술성이 높을 수 있고, 한국적이지만 보편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던지는 시사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막과 번역의 한계를 유월(踰越)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역시 봉준호가 남긴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1인치 자막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미국인)은 훨씬 더 좋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2020. 1. 5,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자국 영화를 선호하면서 외국 영화를 보려면 감수해야 하는 자막을 그는 “1인치 장벽”이라 불렀는데, 봉 감독이 이룩한 작지만 위대한 성취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장벽의 일부를 허무는 데 일조했다는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번역 타령을 해댔습니까? 유독 탁월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민족의 문학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 하나를 받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을 번역 문제로 치부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번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 이상 번역도 또 하나의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여실하게 증명되었습니다. 번역이 아니라 내용이 얼마나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 봉준호와 한강은 바로 이러한 면이 문학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일종의 도전(challenge)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면서 각자의 반응(response)을 촉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셋째, 가부장제(paternalism)의 혁신적 파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뉴욕타임스는 노벨문학상 발표가 난 지 하루만에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한국의 최고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기념됐지만, 한강 작가와 다른 여성 작가들이 대표하는 것은 여전히 뿌리 깊게 가부장적이고 종종 여성 혐오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라는 논평을 내놓았습니다. 여기서는 남성중심주의나 권위주의를 가리키지만, 가부장제라는 개념은 더 확장 적용이 가능합니다. 한강과 봉준호는 이전에 소위 ‘블랙리스트’에 나란히 이름이 올랐습니다. 2016년 당시 특검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 백서”를 통해 그런 사실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문화나 예술을 마치 부모처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가부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단지 픽션일 뿐인데, 여전히 소재를 문제 삼고 방향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 일상에도 그런 잔재들이 많습니다. ‘한 발자국 가까이’나 ‘휴지는 휴지통에’라는 문구들을 생각해 보세요. 전 국민이 모두 이런 지시를 하나하나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노벨상위원회가 어째서 고은이나 황석영이 아니라 한강에게 상을 안겨주었는지를 우리 모두 다 같이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