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5년전 10월 부마항쟁이 있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여러 형태로 전개 되지만 실제 당시 눈과 귀로, 피부로 와닿았던 민주인사는 거의 하늘나라로 갔다. 금년 10월 16일은 (재)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3대 이사장에 박상도 이사장(전 부산YNCA 이사장)이 새로 취임했다. 박 이사장이 필자에게 모처럼 연락이 왔다.
축하인사와 함께 박이사장 왈 “형님 지금 그때 당시 부산중부교회 관계했던 청년들과 재야 인사들 대부분이 하늘 나라에 가고 형님과 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 생명과 호흡을 연장시켜 주신 만군의 주 여호와께 거듭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부마민주항쟁 기념일은 국가가 10월 16일 행자부 주관으로 부산시청 광장에서 거행되고 있다.
10월 부마 민주항쟁은 어떻게 전개 되었나?
오늘날 대한민국에 민주주의 꽃을 피게 한 것은 부마민주항쟁이란 씨앗이 뿌려졌기에 싹이 나고 열매를 맺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5년전 1979년 10월 암울했던 군사독재와 유신정권을 종식시켰던 것이 부산과 마산 민주인사들의 피 맺힌 몸부림과 희생의 제물이 된 민주 인사들이었다.
관계했던 주요 인사들 대부분은 지금 하늘 나라에서 이 나라를 지켜 보고 있을 것이다.
부산중부교회(당시 기장교단 경남노회 소속) 담임했던 고 최성묵 목사와 심응섭 목사(부산중부교회 직전 담임), 고 임기윤 목사(기감, 제일감리교회 담임), 고 김광일 변호사(부산중앙교회 장로 당시), 고 이흥록 변호사(카톨릭 평신도), 송기인 신부 (남천성당 주임신부 당시), 고 김동수 장로(부산영락교회, 부산대학병원 교수 의사), 고 우창웅 장로(부산진교회 장로, 부산교육대 해직교수), 박상도 이사장(부산중부교회 집사, 부산YMCA 이사장 역임), 고 유기선 장로(당시 부산영락교회 장로, 유기선의원 원장), 김정광 목사(당시 부산YMCA 총무), 김형기 목사(당시 부산중부교회 집사. 부산Y 간사), 차선각 목사(KFCF 간사) 등 부산중부교회 청년 대학생 및 문부식, 김은숙(고인, 당시 부산중부교회 주일학교 교사, 고신대 교육학과, 신학과 학생,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주동자), 김희욱 집사(양서협동조합 총무. 부산영락교회 집사). 잘 훈련된 부산중부교회 기독청년 대학생 고 김영일, 이태원, 조성삼 장로(당시 청년. 작고) 20~30여명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대학생 청년들이었다.
무엇보다 부산도시산업선교회 총무로 맨 앞에서 나섰던 박상도 이사장. 이를 뒤에서 물질과 변호로 법적 뒷받침을 해 주었던 김광일 변호사, 민주인사들을 결집시켰던 대부 고 최성묵 목사(부산YMCA 총무, 부산중부교회 담임)가 없었다면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부마 항쟁의 불씨는 보잘 것 없는 부산 중구 보수동 헌책방 골목 2층 벽돌 건물에 자리 잡고있던 부산 중부교회. 이 교회에서 매주 1~2차례씩 민주인사 석방 기도회로 부산 대학가 당국과 온 경찰서 정보과 형사, 정보부 부산 분실 관계자, 보안사 삼일공사 기관원들이 총 동원 하다싶이 매일 주시하고 관찰한 곳이 이곳 부산중부교회 요시찰지로 여겨왔다. 필자는 이곳에서 근 10여년 간 집사 평신도로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지켜 보고 온 산 증인으로 남아 있었던 교계신문(교회연합신보) 기자로 활동했다. 김광일 변호사를 교회연합신보 신문지사장으로 모시고 있던 관계로 더욱 이들의 재야 활동을 일일이 주시하고 가슴에 담아 두고 기록하고 있었다. 언론 통제로 기사화 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라 메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안사 담당팀장으로부터 부산중부교회를 나와 다른 교회로 가지 않으면 친동생이 육사(27기) 연대장 대령에서 장군 별자리는 달 수 없다는 협박과 회유로 할 수없이 지금의 부산 은성교회로 교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를 뒷날에 ‘부산 예수. 한국교회 역사의 현장’이란 책에 수록하고 발간한 것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곳 부산중부교회야말로 수도권에서 일어난 재야 인사들의 탄압사건은 하루, 이틀 만에 모두 정보가 알려져 있을 만큼 부산 재야 인사들의 고향이자 민주화 성지였다. 중부교회는 부산 민권운동의 원동력이자 민권운동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구실을 한 정보 산실이기도 했다. 동시에 부산 YMCA가 뒤에서 밀어 주고 함께 힘을 모아 준 것도 연합적인 공유로 지렛대 역할을 감당해 민주항쟁을 이루어 낸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재야 기독인사들 대부분이 하늘나라로 가고 없지만 지금도 살아 활동하는 박상도 이사장이 부산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3년간, 직무)을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다 과거 몸으로 헌신 한 결과이고 열매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민주화를 이루게 했던 부산 민주항쟁은 영원토록 자유대한민국에 길이 남을 자랑스런 역사의 대명사로 자리 잡아 갈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적 인물(김대중, 김영삼 장로)들은 부산중부교회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김대중씨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이를 면회하러 간 인사도 중부교회 청년들이고 김영삼 장로가 재야 운동의 근원지 부산중부교회 배후에서 기도회를 열어 주고 영적 힘을 실어 주어, 국회의원 출마했던 부산 서구, 중구 지역 민중들이 지원하고 밀어준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인물이 김영삼 장로이다. 서구 대신동교회(여동생, 동서 출석), 남부민중앙교회(손상률 목사 담임)도 2003년 10월 21일 부산롯데호텔에서 김영삼 장로 초청 부산 기독교계 지도자 간담회를 열어 준 것도 부산 교계 지도자들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산 교계 숨은 역할과 결집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45년이 지난 오늘날 부마 민중항쟁의 일지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한다는 것이 역사적 영향권을 행사하며 살아 숨 쉬고 있는 산 표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