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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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부열(甘富悅)로 알려진 아치볼드 캠벨(Archibold Campbell, 1890-1977) 선교사는 여러 일화를 남긴 선교사였고, 그의 여러 가족이 한국 선교사로 일했던 한국선교 가족이었다. 그의 형 에드워드 캠벨(Edward Campbell, 甘茂悅, 1887-?), 여동생 메리(Mary Cross Campbell, 1892-1969)도 한국선교사였고, 이종사존 마리안 킨슬러(Marian Kinsler)와 헬렌 킨슬러(Helen Kinsler)도 한국 선교사였다.

 

감부열은 1890년 9월 28일 필라델피아에서 에디슨 캠벨과 애니 런던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913년 6월 시에틀의 와싱턴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얻은 그는 곧바로 프린스톤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1916년 신학사 학위(BD)를 받았다. 그해 9월에는 헬렌 막스웰 오트(安惠理, Helen Maxwell Ott, 1888-1972)와 혼인했다. 한달 후인 10월 24일 미국북장로교 시아틀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선교사로 파송되어 12월 9일 부인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2년 앞서 1914년에 내한했던 형과 누이 동생 부부는 선천과 청주에서 각각 사역하고 있어 한국이 낯설지 않았다. 내한한 감부열은 평안북도 강계 선교부로 배속되어 1917년 2월부터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에 정주하면서 강계를 중심으로 평안북도 북부지역, 곧 산서(山西)노회 지역의 강계, 후창, 장진, 자성, 위원 등지의 교회를 관할했다. 1918년부터는 지역교회 순회와 관리 외에도 강계읍의 명신소학교와 영실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24년 6월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펜실베니아대학교애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문학석사(MA)학위를 얻었고, 1925년 다시 임지로 돌아와 영실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이 영실학교는 1931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 당시 재학생 80명 가운데 85%가 기독신자였다고 한다. 그 졸업생 중의 한 사람이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고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던 서정환 이었다. 그는 감부열 선교사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학생이었다.

 

강계선교부에서 일할 때 감부열은 1930년 8월 동료 선교사들과 백두산탐사여행을 다녔는데, 사울세브란스병원의 부츠, 연희전문학교의 피셔, 남감리회의 에머릭, 성서공회의 홉스, 서울의 사업가 모리스 등은 회령선교부의 맥밀란과 만나 두만강 무산에서 출발하고, 감부열은 계레지병원의 바이람, 한국을 방문한 장인 오트와 함께 압록강 혜산진을 출발하였는데 두 팀이 산지연에서 합류하여 백두산을 등반했다고 한다. 감부열은 여름휴가 때 백두산 정상을 오르곤 했는데, 백두산 생태계를 촬영하여 1931년 6월 25일 선천기독청년회관에서 ‘백두산 실사회’를 개최한 일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감부열은 수영도 좋아하여 백두산 천지(天池)를 가로 질러 수영했던 사람은 오직 3사람 뿐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천지는 신성시 되던 곳인데, 수면은 해발 2,257m, 면적은 9.165 km2, 둘레는 14.4 km이고, 평균 깊이는 213.43m라고 한다. 백두산 천지를 가로질러 가려면 동서 길이가 3.54km, 남북으로는 4.5km라고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거리였다. 무엇보다도 수온이 낮고 수압이 높아 수영하기 어려웠으나 감부열은 그렇게 했다고 한다.

 

1932년과 1933년 두 번째 안식년을 보냈다. 다시 임지로 돌아왔을 때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심화되면서 1935년부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선교학교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학교를 유지하던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던지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북장로교는 이론과 격한 토론이 있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기로 했다. 결국 영실학교도 1938년 폐쇄되었고, 남아 있던 재학생은 일단 선천의 신성중학교로 보냈다. 감부열은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산서노회의 80여 교회를 돌보며 교인들을 격려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집회를 인도했다. 그러다가 1940년 6월, 세 번째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일관계가 악화되었고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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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감부열 선교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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