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창세기 18장 33절
우리나라에 <찔레꽃>이란 같은 이름의 노래가 세 곡이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박태준> 작곡의 동요인 <가을밤>의 곡에 <이원수> 선생이 가사를 붙인 곡입니다. 이 곡은 엄마 생각을 간절하게 합니다. 이 곡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얼마 전 부모님 살던 집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간절히 그리웠습니다. 그때는 거기가 집이었습니다. 체온을 느끼며 함께했습니다. 늙고 연약해지셔도 부모님은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젠 다 안 계십니다. 손자가 태어났을 때도 알려드릴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것에 눈물이 났습니다. 부모님의 부재는 집의 상실로 다가왔습니다.
종종 나중에 어디서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근 삼십여 년 살았던 부산, 강을 좋아하니 북한강이나 남한강변, 산을 좋아하니 공기 좋은 설악산 근처, 아니면 아들이 사는 울산 근처, 혹은 아직 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서울 근처에 살아야 하나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러나 어디도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가지 않는 큰 이유는 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생존의 조건으로 의식주를 말합니다. 그중에서 <주>는 단순한 집이 아닙니다. 사람은 흔들리는 나그네입니다. 집은 인생을 붙들어주는 것은 마음 붙일 곳입니다. 그곳은 집 이상입니다. 고대광실이라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인생을 붙들어주지 못합니다. 초가삼간이라도 마음이 가는 곳이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곳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8장 3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여기 <곳>이란 <마콤>이란 히브리어인데, 여러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NIV성경』은
그가 살던 마므레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5킬로 정도 남쪽에 위치한 헤브론 근처로 보입니다. 그의 주거 형태는 장막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소돔을 멸망시키러 가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 대접했고,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을 낳을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 후 그들이 소돔성으로 떠날 때 아브라함은 따라가며 전송했습니다. 창세기 18장 16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의 장마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몇 분 정도 걸어야 할 거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은 어떠했을까요? 그곳에는 아내 사라와 종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 하나님께서 계셨을 것입니다. 일찍이 조카 롯이 소돔 방향으로 떠난 후 아브라함은 그대로 빈들에 남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3장 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장막은 불편했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잘 지어진 성읍 안에서 살았으나, 유황불에 멸망했고, 아브라함의 장막은 안전했습니다. 소돔이 멸망하던 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전송하던 곳에서 소돔의 멸망을 바라보았습니다. 창세기 19장 27~2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우리의 <곳>은 어떤 곳인가요? 우리의 <곳>도 하나님을 뵙는 곳이 되길 원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둘러싼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용서하시고 변화시키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녀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겁박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그 전날 분노한 채로 <자기 집>으로 갔고,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곳>이 어떤 곳인가에 따라 장차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까지 결정될 것입니다. 삶의 처소를 하나님 안에서 경건하게 가꾸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