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방에서 서양음악은 초기 설립된 교회를 통해 선교사들의 지도로 찬양대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번에는 북장로교 선교부와 초량교회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부산에 온 첫 북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의 부인 애니(Annie Baird, 1864-1916)는 음악 애호가였다. 캔자스 주의 토피카 출신인 그는 피아노나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고,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예수사랑하심’을 번역했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애니는 다섯 자녀를 출산했는데, 첫째 딸과 넷째 아들을 한국에서 잃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1891년 1월 29일 부산으로 입국하여 서울에 체류하던 중 그해 9월 초 부산으로 이주하여 부산지부를 개척했다. 1892년 7월 5일에는 첫 아이 낸시 로즈(Nancy Rose)를 출산했는데, 1894년 5월 13일 두 돌도 채우지 못하고 뇌막척수염으로 사망했다. 이때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 지금 찬송가 387장에 수록된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며 곤하여”라는 가사이다(그의 넷째 아들 아더 팰리스는 1901년 12월 5일 평양에서 출생했는데 두 돌이 되기 전인 1903년 1월 18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이를 시작으로 애니는 여러 찬송가 가사를 썼다. 애니가 작시하거나 번역한 찬송가가 ‘찬미가’(1895, 1897)에는 10편, ‘찬셩시’(1898)에는 28편이 게재되었고, 1905년판 ‘찬셩시’에는 58편이 게재되었다. 전체 151편 중 38%에 해당한다. 1983년의 통일찬송가에는 30편이 수록되었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두 곡, 고 “나는 갈길 모르니”(375)와 “멀리멀리 갔더니”(387)가 실려 있다.
윌리엄 베어드는 1895년 1월 부산에 한문서당(Chinese School)이라는 남자학교를 열었는데, 학생 수는 25명 정도였다. 애니는 이 학교에서 풍금을 가지고 음악을 가르쳤다. 베어드는 선교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아내 애니가 찬송가를 가르쳐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고. 서양음악은 선교사들을 통해 교회나 기독교 학교 중심으로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부산에서의 첫 피아노는 북장로교 선교사 사보담(William Sidebotham) 부인 에피(Effie)의 것이었다. 그들이 1900년 11월 대구지부에서 부산지부로 이동함에 따라 피아노도 부산의 서양식 악기가 되었고, 부산에서의 서양음악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초량교회에서의 예배, 찬양대의 활동은 사실상 서양음악의 보급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호주선교사이자 일신여학교 교장이었던 위대서(Muriel Withers)가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1918년 내한했고, 1923년부터 부산에서 일했는데 자신이 속한 부산진교회 찬양대 운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1930년대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하였다. 당시 초량교회 이약신 목사는 1931년 9월 말 부임하였는데, 그도 음악에 소질이 있었고 성악에 재능있어 공예배에 특송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그는 진주에서 시무할 당시부터 호주 선교사들과 긴밀했다. 이런 관계로 호주 선교부의 위대서 교장이 초량교회 찬양대를 지도하게 된 것이다. 1934년 6월 당시 초량교회 찬양대원은 20여명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이, 교회를 통한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서양음악이 소개되었고, 부산지역의 여러 교회에 찬양대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1934년 말에는 60여 명으로 구성된 부산지역 교회연합 찬양대를 구성하였고, 그해 12월 25일에는 부산시청에서 성탄절 기념찬양대회를 개최했다.(사진) 이때 음악회를 주도하고 찬양대를 지휘한 이가 호주선교사 허대시(Daisy Hocking)였다.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가 주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제일영도교회, 수안교회, 항서교회, 대연교회, 초읍교회 등도 동참했을 것이다. 기독교회는 양약 전파의 주된 통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