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뜬금없이 여의도 발 ‘배신의 정치’가 무더운 날씨보다 더 핫하게 국민의 일상을 달군다. 너나없이 모이면 배신에 관한 이야기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 가운데서 회자하는 말이다. 당권을 가지려는 후보들이야 무슨 말을 안 하겠는가만 그래도 후보들은 상대방 공략의 수단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나드는 듯한 말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 배신은 인간사에 더 없는 추한 용어다. 배신의 몰락은 역사가 정의한다. 우리 정치사에서도 배신의 정치 종말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어쩌면 국민의힘 당원들은 듣고 보노라면 이맛살 찌푸리게 하는 말일 것이다. 배신이라는 용어를 입에 올리는 것은 정치권의 막판 어법이다. 더더욱 한솥밥을 먹으면서 선거가 끝나면 다시 함께 한 밥상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들어야 할 관계를 생각한다면 이런 말은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생각으로 삼켜야지 입으로 내뱉으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된다. 하기야 우리 정치사에서 20세기 최고 정치지도자 ‘윈스턴 처칠’ 같은 정제된 어법을 사용하는 지도자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도 여의도 1번지는 난장판이다. 국민은 정책대결을 원하고 품격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성경에서 배신의 정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있다. 구약에서는 아히도벨이고 신약에서는 가룟 유다가 배신의 아이콘이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정책보좌관이었다. 그의 모략은 가히 신적인 것으로 취급받는 뛰어난 모사(謀士)였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압살롬 반란의 주모자가 되어 다윗을 배신하고, 자신의 모략으로 압살롬을 세우려 하다가 실패하게 되므로 고향 성읍으로 돌아가 목매어 자살한 성경 최초의 고의적 자살의 주인공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하나로 재정책무를 맡을 정도로 신뢰를 받는 제자였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되어져가는 상황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의리를 버리고 은 30에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겨주고 후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목매어 죽었다. 복음서에는 ‘예수를 판자 가룟 유다’로 기록되었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배반한 죄인이자 악마의 하수인,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린다. 배신 정치의 몰락을 역사에 거울처럼 남겼다.
대한민국의 배신 아이콘은 이완용이다. 조선왕조 말기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이완용은 친미파의 주동 인물이 되었다. 소련이 국제정세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러시아어를 익혀 친소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노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게 되면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우리나라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갈 때는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그러나 역사는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매국노라고 말한다.
배신(背信)이 무엇인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믿음과 의리를 저버림이다. 배신의 정치가 회자하는 여의도 1번지의 소위 선량(選良)들에게 묻고 싶었다. 국회의원 선서를 한 그 내용을 지키고 있는가? 예라고 답할 수 없다면 그것이 국가와 국민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파편 같은 말이지만 “사심의 정치가 배신의 정치” “차별화와 배신은 종이 한 장 차이” “배신의 정치는 성공하지 못한다.” “배신 말아야 할 대상은 국민” 등 당권 후보들의 배신의 정의를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위한 사심(私心)의 수사(修辭)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나무 한 그루를 간과하지 않고 언제나 숲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성찰을 통해 배신 하지 않아야 할 대상을 생각한다. 국민은 그런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다. 모세가 그랬다. 다윗과 사도바울이 그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본이 되었다. 혜안(慧眼)이 있어야 통관(通觀)이 되고 통감(通鑑)의 지혜를 갖게 된다. 조급하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다 보면 낭패를 보기 쉽다.
어느 날 은퇴를 앞둔 후배 목사님이 찾아오셨다. 한 마디로 배신의 상처를 안고 치유할 수 없는 상황에 성직을 내려놓으려 하는 아픈 상담이 시작되었다. 그 목사님 손을 내 손으로 감싸고 조용히 일러주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것 다 아시면서도 생애 마지막 만찬석까지 가셨는데 목사는 거기까지는 가야 목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나를 바라보는 목사님의 얼굴은 지칠 대로 지친 아픔이 서려 있는 표정이었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이 목사를 지치게 하는가?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나는 잘 표출하지 않았던 나의 삶 한 부분을 들려주었다. 은퇴 10년이 된 오늘도 나는 뇌신경암과 투병하면서도 한 주도 쉼 없이 전국 방방곡곡 초교파적으로 말씀 사역을 하면서 포항중앙교회 원로 목사로 오늘을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와 중앙교회 성도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여정에서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하고 슬프고 치욕적인 아픔을 당하기도 한다. 슬프고 아파서 숨이 막힐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배신이라는 단어를 내 입에 단 한 번도 올리지 않고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여전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오늘을 살고 있다. 분명한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요셉과 모세와 다윗과 사도바울이 그토록 배신을 당하면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오늘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의 중심에는 포항중앙교회에 대한 나의 믿음과 의리를 지켜야 할 원로목사로서의 절체절명의 사명 때문이다. 네가 배신했다고 나도 배신하는 삶은 똑같은 배신의 몰락자가 된다. 어쩌면 화나고 속상한 아픔이 더 많을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감사한 것 한 가지를 붙잡고 오늘을 살아간다. 그것이 믿음의 정도(正道)를 정행(正行)하는 것이다. 새로운 결단의 각오를 하고 일어서는 목사를 내 품에 안아주면서 눈도 젖고 마음도 젖어 들었다.
아름다움은 我에 접미사 ‘답다’의 합성어다. ‘나’다울 때 아름다운 것이다. 추하다는 것은 酉(닭유-술병을 뜻함)와 鬼(귀신귀-가면을 뜻함)의 합성어 醜(추할 추)다. 술병을 들고 가면을 쓰고 헛소리하면서 비틀거린다는 뜻이다. 백합은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꽃이지만 썩으면 극심한 악취를 내는 꽃이다. 국민은 아름다운 지도자를 보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