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사 존 로슨 시블리(John Rawson Sibley, 1926-2012)는 최근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는 대구 동산병원(1961-68)에서 그리고 거제도(1969-1977)에서 8년간 의료사업을 펼쳤던 인물이지만 거제도 주민조차도 그의 봉사를 모르고 있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부산 늘빛교회 시무장로였던 정태산 의사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는 그의 봉사를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앞선 시대의 봉사자를 기억하는 것은 후대 사람의 도덕이기도 하다.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에는 ‘전사불망 후사사야’(前事不忘 後事師也), 곧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후일의 스승이라’고 했는데 시블리의 헌신은 오늘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존 시블리는 1926년 10월 7일 미국 뉴저지주 메일플우드에서 노만 시블리(Norman Sibley)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43년 앰허스트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중인 1945년 2월 육군에 입대하여 일본에서 복무하였다. 이때 만난 의료선교사 토핑(Dr Topping) 여사의 영향으로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48년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만난 진 버틀러(손진희, Jean Lee Butler, 1926-?)와 그해 7월 2일 혼인했다. 부인은 교육학을 전공한 영어교사였다. 시블리는 의학 공부를 위해 노스웨스턴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병리과 2년, 일반외과학 4년의 수련의 과정을 이수하고, 1960년 부인과 함께 미국북장로교선교사로 내한하였다. 1961년 대구지부로 배속되어 대구동산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하게 된다. 마펫 원장의 안식년 기간에는 원장 서리로 일했다. 동산병원에서 일하는 한편 대구 한센병 전문병원인 애락원에서 외과진료를 병행했다. 특히 그는 병원신축이 필요하다고 보아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벌려 애락원에 3층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는데, 국내에서 유일한 정형외과 수술관이 되었다. 이 애락원이 1968년에는 대구애락보건병원으로 개칭되었다. 시블리는 정형외과 김익동 과장과 더불어 한센병 환자 수술을 시행했는데, 한센병의 이차 증상으로 오는 안면 마비 환자에게 근전이술과 안면 현수 고정술, 또 눈썹이 사라진 자리에 두피 머리카락을 이식하는 수술을 시행하는 등 한센병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1963년 동산병원의 이철 외과 과장이 3년간 미국 연수를 가고 없을 때는 다른 의료선교사인 존 해밀턴 다우슨(John Hamilton Dawson)과 함께 외과과장으로 일하면서 미국의 선진 의료기술을 전수하였다. 1964년에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성형외과 및 일반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이수하는 등 의료기술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다시 내한한 1969년에는 거제도로 가서 의료활동을 재개하였다. 그가 거제도로 간 것은 그곳의 의료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시블리 의사는 세계교회협의회 산하 기독교의료위원회(CMC)에서 ‘거제지역사회보건시범사업’(Jojedo Community Health and Development Pilot Project) 승인을 받아 거제군 하청면 실전리에서 시범사업을 위해 ‘거제건강원’이라는 기관을 개설하고 전통적인 병원 중심의 의료가 아닌 예방 등 더 넓은 의미의 지역사회 보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거제 주민들은 이곳을 ‘실전병원’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시블리 의사는 우리나라 공중보건 역사상 중요한 ‘지역사회의학’을 도입한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시블리는 치료의학의 한계점을 발견하고 차츰 병원 중심의 치료의학으로부터 지역사회 보건교육 및 일차보건의료접근법을 활용한 지역사회의학을 개척한 것이다. 이것은 저비용 고효율의 1차 의료보건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제도에서 첫 사역은 대구동산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한 고수자, 김정남, 문태임, 유시영 등 네 간호사가 동참하였다. 유승흠 의사도 약 1년간 시블리 의사와 동역했다. 그 후 시블리 의사는 부산 복음병원 장기려 박사에게 자신의 의료사업을 도울 한국인 의사를 천거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 때 장기려 박사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복음병원 내과에서 일하던 정태산 의사를 천거하였다. 그래서 정태산 의사가 거제도로 가서 시블리 의사와 같이 오랜 기간 동역하였다. 시블리 선교사는 거제도에서 8년간 일했는데 ‘섬 주민을 돌보는 선교사’라는 제목으로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거제도에서의 사역을 마감하고 1977년 51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거제도에서의 경험을 기초로 보건학에 대한 논문으로 1979년 하바드대학교로부터 석사학위를 받았고, 1980년에는 태국의 피난민 켐프에서 보건사업을 전개하였다. 1981년에는 다시 내한하여 연세대학교에서 지역사회의학 교수로 활동했다. 1983년에는 네팔로 가서 의료선교사로 3년간 봉사했다. 의료선교사직에서 은퇴한 그는 미국에서 의사와 교수로 활동하고 2012년 6월 24일 85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거제도 주민들은 시블리의 공적을 기념하여 공적기념비를 세웠다. 슬하에 4자녀를 두었는데, 차남 노만(손용만, Norman Sibley)는 마삼락 박사와 더불어 1982년 한국이 풍물 사진을 엮어 First Encounters라는 영문 책을 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