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1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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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깊어갈수록 새벽도 가까워 온다. 나라 안팎은 최근 들어 더욱 어둠이 짙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무엇보다 빛으로 충만해야 할 종교계와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안방에 전달되는 정치권 소식에서는 밝은 내용을 접할 수가 없다. 백화점이든 재래시장이든 경제상황도 여전히 시린 겨울 소리를 내고 있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봄을 맞아 펴는 기지개를 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눈과 귀에 잡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두움이 깊어진 것 같지만 기어코 어두움이 빛으로 전환되는 부활의 아침은 오고 있다. 

 

  사순절의 절정인 고난주간은 영적으로 깊은 어두움의 시간이다. 동시에 부활의 아침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경험하는 카이로스의 은총을 체득하는 깊은 영성의 크로노스다. 부활신앙이란 부활절 중심의 몇 날 동안 하는 축하가 아니다. 오히려 1년 365일을 부활의 은총을 연주하는 삶이 곧 부활신앙이다. 바로 세상에 살면서 빛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주님은 부활의 은총을 입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다. 빛은 비췸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인의 본래적 사명을 살펴보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생명이며 빛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소금과 빛의 차이점을 보면 소금은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극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며, 빛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한복음 9:5절).” 여기서 ‘세상’에 해당되는 Cosmo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바올람’이다. 원래 이 단어는 ‘영원’ ‘불변’ 등의 의미를 나타냈지만 후대에 이르러서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고통의 현세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고통의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은 구원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펼쳐지는 빛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빛의 의미는 3가지로 조명할 수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갖고 있는 생명체를 의미한다. 둘째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善을 의미한다. 셋째는 영적인 관계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빛의 반대인 어두움의 3가지 의미로는 첫째, 자연계와의 관계에서 생명이 상실된 죽음이다. 둘째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악을 의미한다. 셋째 영적인 관계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어두움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셨다는 것이다(요1:5). 그것이 부활의 은총이고 부활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세상에서 빛으로서 삶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의미를 역설하면서 삶으로 이를 증거한 사도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 5:8-9).” 바로 이것이 ‘어두움에서 빛으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 되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 이것이 부활신앙의 삶이다.

 

  이 말씀에는 아주 중요한 본질적인 의미가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Doing이 아니라 Being, 다시 말하면 무엇을 행하느냐 보다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 있는가에 대한 인식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되어 있지 못하면서 되려고 하는 것을 ‘행동주의적 기독교(behavioristic Christianity)’라 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21:23).” 하고 책망하신 일이 있었다. 전형적인 Being이 아닌 Doing의 사건이다. 카오스현상이 되어가는 교회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개인의 기쁨을 위해 많은 사람이 아파하는 일을 행하는 것을 정당하고 의롭다고 항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를 공동체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Being의 사람이 아닌, 나에게 모든 사람이 맞추어 주기를 바람하는 Doing의 사람이다. Being의 사람은 무엇이 되었다고 다르지 않다. 변함없이 항상 그대로 주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데 Doing의 사람은 무엇이 되고 나면 변한다. 어제와 동일하지 않다. 모든 기준이 자기가 되어 간다. 

 

  중요한 것은 “주여 나는 빛입니다.”라고 할 때 그는 이미 어두움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할 때 그는 이미 죄인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대로 “나는 빛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때 실제는 빛이 되어지는 것이며,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그 순간 이미 그는 의인으로 칭함받는(Justification) 은총을 입게 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빛이 되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높이려는 것이 아닌 자신을 높이려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좀 어려운 말 같지만 참 빛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도구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무엇이 되겠습니다.”의 삶을 살아야 한다. 무엇이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맞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부활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Doing이 아닌 Being의 의미를 깨달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부활 신앙인의 삶이다.

 

 “잘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을 앙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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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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