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공주지방 선교사였던 프랭크 윌리엄스(禹利岩, Frank Earl Williams)와 그의 아들 조지 윌리엄스(禹光福, George Zur Williams)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프랑크 윌리엄스, 곧 우리암 선교사에 의해 발전된 공주읍교회와 이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양두현(梁斗炫) 장로와 그 후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공주읍교회는 후일 공주제일교회로 불리게 되는데, 스크랜튼 선교사를 한강이남 지역 관리자로 임명하면서 공주지역 선교활동이 시작되었고, 1898년 스크랜튼에 이어 수원, 공주 지역 관리자로 임명된 스웨어러(W. C. Swearer, 1871-1916) 선교사는 1902년 가을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하여 초가 1동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린 것이 공주읍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교회가 남부지역 최초의 감리교회였다. 1903년에는 원산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맥길(W. B. McGill, 1859-1918)과 이용주 전도사가 전도활동에 동참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샤프(R. A. Sharp, 1872-1906) 선교사가 공주로 오면서 선교활동이 확대된다. 즉 로버트 샤프는 명설학당을, 부인 엘레스 샤프는 명선학당을 설립했다. 그런데 샤프 선교사가 순회전도 여행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6년 3월 5일 급사했고, 대신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가 1906년 공주로 오게 되는데, 그는 이전 학교를 수습하여 영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 학교가 후일 공주 지역 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이 학교에서 수학한 이가 유관순 의사였다. 감리교 공주선교부 거점 교회로 출발한 공주읍교회는 건실하게 성장하였고, 안창호, 윤성렬 목사, 황인식 등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크게 기여한 인물이 양두현, 지누두 부부였다. 이들은 우리암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공주제일교회 출석하며 믿음으로 살았는데, 새벽기도회 참석, 십일조 헌금 등 당시 성도들에게 본을 보았고, 교회와 이웃에게 사랑과 선행을 행하며 교회를 섬겨 공주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드려 전도사업을 전개하게 했고 교회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를 잘 아는 우리암 선교사는 양두현, 지누두 부부가 회심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는 과정, 그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토지를 기증하려는 의지 등에 대해 선교사들이 발간하던 영문 잡지 Korea Mission Field 1924년 12월호(254-5쪽)에 소상하게 소개했다. 양두현은 1938년(소화 13년)에는 전답 20,963평을 교회에 기증했다. 당시로 볼 때 엄청난 재산을 교회에 희사한 것이다. 이때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명의로 포상장을 수여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포상장 공주지방 공주읍교회 양두현. 우인(右人)이 자기의 소유 재산인 전답 20,963평을 본 교회 천국사업에 봉헌하였음으로 그 봉사적 성의를 표창하기 위하여 자에 은제(銀製)상패 1개를 수여함. 소화13년(주후1938)년 10월 1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사 양주삼.” 이런 헌신을 고려하여 공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서만철 박사는, “양두현은 공주지역의 대지주로서 공주감리교회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고 평가했다.
양두현 장로의 아들이 양재순(梁載淳, 1901-1998) 박사인데, 공주 영명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하고 1922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리학(文理學科)에서 1년 간 수학한 후 1923년 세브란스 의전에 다시 입학하여 1925년 졸업과 동시에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함흥 자혜병원, 군산 구암병원 등에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1927년에는 공주에서 공제(公濟)의원을 개업했다. 공주에서의 제1호 양의사였다. 이때부터 70여 년간 인술을 베풀며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했다. 특히 그는 선대에 이어 공주읍교회를 섬겼고, 1958년에는 장로로 장립 받아 봉사했다. 그는 공주제일교회를 위해서도 재산을 헌납했지만 특히 1980년에는 공주시 계룡면 화은리에 화은감리교회를 사비로 신축하고 그 교회와 인근 주민들에게 20여 년 간 무료진료를 하기도 했다. 우리암 선교사가 194년 일제에 의해 한국을 떠나게 되었을 때 “영명학교는 양재순, 당신이 맡아야 해”라고 하여 양재순 박사는 1940년부터는 모교인 영명학교(영명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 봉사했고, 이보다 앞서 1946년에는 충청남도보건후생국장을 맡아 도정에도 관여한 바 있다.
양재순 박사의 넷째 아들이 부산교계에 널리 알려진 양덕호(梁德鎬, 1934- ) 박사인데,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서 3년간 수학 한 후 선대의 유지를 따라 의사가 되고자하여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 후 장기려 박사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외과과장으로 근무하며 여러 의료기관 사회봉사기관에서 활동했다. 1982년에는 부산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어 3대째 장로로 주님을 섬겼다. 특히 그는 장기려 박사가 시작한 부산 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이사로 25년간 봉사했다. 양덕호 장로는 선친의 공제의원과 그 주변 땅을 공주제일교회에 헌납하여 교회의 재건축을 가능하게 했다. 양덕호 박사의 아들이 양한광 박사인데, 서울의대 출신인 그는 위암수술의 권위자로 서울대 암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지가 선정한 세계 50대 의사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암 선교사로부터 받은 복음이 양두원- 양재순- 양덕호- 양한광으로 이어지며 인술을 더하여 우리 시대에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