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보내신 예수님은 이른 아침,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배가 좀 고프셨나 봅니다. 멀리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풍성한 것을 보시고는, 열매를 얻을까 하여 가까이 가십니다. 그런데 잎사귀만 무성하지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은 좀 이해하기 힘지요? 이 본문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나무인 무화과나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본격적인 수확기는 6월에서 7월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따라서는 좀 이른 시기인 3-4월에 열매를 맺기도 하고, 반대로 좀 늦은 시기인 9-10월에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먼저 맺히고, 잎은 나중에 무성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구하러 다가가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무를 저주까지 할 필요는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바로 허울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신앙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하나도 없는 껍데기 신앙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워야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1.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껍데기 신앙 – 종교 외형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바리새인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면 대단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포장을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습니다. 자,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쓰고, 사람들의 시선에는 집중하지만,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멀어져 있다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신앙입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는데, 행동은 도무지 주님의 뜻과는 관련이 없다면, 그게 열매 없는 허울뿐인 신앙, 종교의 외형주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혹시 바깥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신앙이, 외형이 아닌 내면이 단단하고 꽉 차 있는 진짜 신앙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2.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우는 교훈은 - 예수님은 우리 삶에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꼭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바로 열매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삶에 정직과 신실함과 의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이 예수 향기를 나타내는 거룩한 열매가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아니, 왜?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도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엎드리는 순간, 기도하는 순간,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기도 응답의 경험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막혔는지도 모릅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내 마음속에 이웃을 향해서 미움이 있다면, 그것이 기도를 막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복음의 한가운데는 용서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한없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세상 속에서 날마다의 삶이 거룩한 예배가 되도록 하시길 축복합니다.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므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