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9-2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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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은 『완득이』의 작가로 유명한 김려령이 2009년 쓴 소설이면서 2014년 동명으로 상영된 영화 제목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같이 조금은 익숙해진 말과 달리 “우아한 거짓말”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여기서 “천지”는 한 소녀의 이름입니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의 둘째로 학교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홀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엄마에게도 무심하기만 한 언니 만지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속내 한번 털어놓지 못하고 끝없이 ‘난 외롭지 않아, 난 슬프지 않아’ 자신에게 되뇌던 그 말을 작가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발표된 지 꽤 지난 이 작품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최근 서이초등학교를 비롯한 몇몇 젊은 교사들의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요즘에는 교사도 학교를 떠난다. 죽지 않으려면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 농담 같지 않은 시대다.”(방구석도서관) 하지만 죽을 만큼 힘이 들면서도 스스로를 우아한 거짓말로 위로하며 지옥처럼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어찌 그들뿐이겠습니까?

 

작품 속에는 화연이란 소녀가 등장합니다. 이 아이는 천지의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나 실제로 화연은 본인을 친구라 믿고 있던 천지를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말을 하며 천지와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기 외에는 친구가 존재하지 않도록 천지 주변을 정리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천지를 통해 얻고 아예 천지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천성이 악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천지가 죽고 난 후 화연은 자기가 따돌림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천지처럼 힘들어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화연은 어릴 적 아픈 경험(학대)으로 인한 우울증과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천지에게 그랬을까요? 그렇다면 이런 경우도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최근 일본의 오염물질 해상투기로 나라가 무척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오염수’가 아니라 ‘오염처리수’라고 부르자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국민들을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선동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취지라고 합니다만, 일본의 그릇된 행태에 반대하지 못한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는 의도는 없을까요?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안전이 달려있으니 결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가 없겠습니다.

 

또 다른 등장인물들도 있습니다. 천지의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알려 하지 않았고 무심하게 지나쳤으며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이들입니다. 천지의 언니 만지와 엄마 그리고 미라라는 아이가 그러합니다.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진실을 외면하고 혹은 방관하며 ‘넌 최고야’ 혹은 ‘너희가 내겐 신(神)이야’와 같은 역시 일종의 우아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식의 언사는 당사자는 물론 실체적 진실의 규명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독립운동가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학교 다니면서 고군분투하셨던 독립군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이 대한민국 군대의 얼굴로 세우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교묘한 논리로 뒤엎으려 하는 가운데 온갖 말들이 난무합니다. 누군가 니체에게 거짓말을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지금 자네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네. 이제부터 자네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신뢰를 파괴하고 진리의 근간을 흔들기 마련인 거짓말은 그 어떤 것이든 우아하게 또는 아름답게 포장될 수 없습니다.(매일경제, 성동찬)

 

천지는 자기 손으로 소중하게 짠 붉은색 털실로 감싼 다섯 개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언니에게, 엄마에게, 화연에게, 미라에게,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남긴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였습니다. 유일하게 우아한 거짓말을 남기지 않은 사람, 마지막 메시지는 그런 자신에게 남긴 정직한 목소리였지요. “마지막 남은 두툼한 털실 뭉치는, 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고 가면, 내가 너무 가엾습니다. 그리고 시립도서관 2층 아무도 손대지 않는 책 사이에 끼워놓았습니다. 같이 있어 외로운 것보다 차라리 혼자 있어 외로운 것이 나았던 그런 곳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저런 합리화로 치장된 우아한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를 직시하고 말하는 용기를 가지고 용서하며 화해하며 차라리 투박한 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진리다’(요 14:6)라고 외치셨던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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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우아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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