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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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무언(有口無言)이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너무도 과분한 은혜를 입을 때도 그렇고, 기가 막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도 그렇고, 잘못을 저지르고 사실이 드러날 때도 그렇다. 살아가노라면 진실과 사실과 왜곡에 혼돈되어 정사(正邪)를 분별 못 하고 우(愚)를 범할 때가 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고 감옥에 갔을 때의 당시 상황에 접근해 보면 어떤 사람은 노예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주인마님을 엿보다가 옥살이한다고 진실을 왜곡하여 비난하고, 어떤 사람은 요셉이 주인마님 방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역설한다. 그런데도 요셉은 어떤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았으니 사실일 것이라고 비난을 더 한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하나님과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만 아는 것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왜곡하여 보디발에게 이야기하여 요셉이 감옥에 가게 된 왜곡의 대표적 사건이다. 세상 방법의 법리적 결론은 왜곡이 진실을 이긴 것 같다. 약자로서의 요셉은 강자로서의 보디발의 아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회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이 상황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루벤스의 작품 <simon과 pero> 명화(名畫)가 있다. 그림의 내용을 모르면 춘화도 같다고 왜곡한다. 그림의 내용으로서는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그림의 진실은 아사(餓死)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향한 딸의 지극한 효성의 마음을 표현한 루벤스의 작품이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사실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 왜곡하여 비난하게 되지만 진실을 알고 나면 숙연해지는 것이다.

 

은퇴 후 9년을 지나면서 전국 600여 교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크고 작은, 도시와 농어촌, 산골과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듣고 보고 느낀, 지상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쟁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진실과 함께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노래하던 교회가 한 순간에 분쟁으로 벌판이 되어가고, 헐뜯고 비방하는 아귀다툼이 되고, 결국에는 산산조각이 난 그릇처럼 되는 것을 본다. 그 분쟁의 중심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고,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하여 벌판이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유명인들의 경찰, 검찰 조사와 관련된 보도가 항상 쏟아지고 있다. 유튜버들은 자기 입맛에 맞추어서 내용을 퍼 나르는데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보는 것 같다. 진실은 법정에서 마무리되지만, 법리적으로 진실이라고 마무리된 사건도 몇 년, 몇십 년이 지난 후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억울하게 옥살이한 예도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접한다.

A 목사의 경우, 예산위원회 예산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통과하여 집행한 특별항목의 지출을 횡령이라고 SNS를 통해 유포되어 A 목사를 바라보는 대부분 사람의 시선이 차갑고, 그 아름답던 인간관계가 뒤틀려진 상황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진실은 모든 회의의 기록이 있고, 사실은 그 금액이 집행되었고, 왜곡은 횡령이라는 단어로 A 목사를 죄인으로 만들고 공동체는 벌판이 되어갔다는 것이다. 결론은 모든 것이 왜곡으로 드러나고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동안 A 목사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로 인한 교회의 혼란과 그 가족들이 받아야 했던 아픔은 그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B 장로의 경우, 개인 사업을 하면서 예배당 건축위원장의 직무를 맡아 교회 건축을 하면서 장로님 개인 돈을 더 많이 들여 건축하였는데, 건축비 횡령으로 고발되어 구치소에 갇히었다. 법정에서 판결로 마무리된 일이지만 진실은 건축비 중 5천만 원을 어음 처리를 위해 당회장에게 허락받고 며칠 사용하였는데 이 사실을 횡령으로 소위 광고지를 예배당 안에 뿌리는 그것이 발단되어 결국 법정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담임목사가 증인석에서 진실보다 교회 상황에 얽매여 5천만 원 사용을 모른다고 하여 B 장로는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재판 결과는 반대로 진실이 밝혀지면서 장로는 억울함이 벗겨지고 대신 목사가 위증으로 처벌받게 된 사건이었다. 진실은 장로가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한 헌신이었고, 사실은 5천만 원을 며칠 사용한 것이고, 왜곡은 그것을 뒤집어 찌라시를 만들어서 뿌리고 담임목사가 거기에 맞추어 동조함으로 교회가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B 장로는 탄원서를 써서 담임목사의 위증에 대한 처벌을 선처해 달라고 판사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 된 후 B장로는 조용히 그 교회를 떠났다. 유구무언이다.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접근방법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사람은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 확인도 없이 왜곡에 관심을 더 두고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이해관계로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그 이해관계 당사자로서는 그 상황의 여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관계의 보편적이라면 극복하는 지혜를 요셉과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한다. 즉 아프지만 침묵하며 자기의 삶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뿐임을 확신하는 마음가짐에서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믿고 대처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요셉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다. 어쩌면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비를 피하지 말고 맞으라는 교훈이리라.

 

필자의 저서 가운데 <성도입니까?>가 있다. 세례받고 교적부에 등재되면 교인이 된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성도는 사전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의 존칭, 천주교에서는 특히 공덕이 높은 신자라고 표기한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인도 성도도 제자도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한다. 나는 어떤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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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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