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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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치 못한 인물이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공산주의와 싸웠던 기독교계 인물이 있다. 그가 감리교의 도인권 목사(都寅權, 1880-1969)이다. 오늘은 그가 걸어갔던 자취를 소개하고자 한다. 

  1880년 1월 17일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한문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으나,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여 14세 때는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24세가 되던 1904년 대한제국 기에 무관학교 군사특별과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1907년 군대가 해산이 되자 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용강에 충일학교를 설립하고 황해도 재령(載寧)의 문창학교와 안악(安岳)의 양산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김구(金九)와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기독교에 소망이 있다고 판단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미국북장로교회 선교사 밀러(F. S. Miller, 민노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92년 11월 내한하여 언더우드가 설립한 예수교학당(후에 경신학교로 발전한다)에서 일했고, 서울 연못골 일대, 황해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사역했던 인물이다. 

  1910년 12월에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명근(安明根)의 독립운동자금모금사건이 탄로되자 도인권은 김구 및 해서교육총회 지도자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해서교육총회’란 1908년 황해도 지역의 교육을 위해 조직된 교육계몽단체인데, 황해도 각처에 설립되어 있는 구식 서당을 근대적 학교로 전환시키고 교육기관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교육활동을 촉진하자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이 조직의 학무총감이 김구였다. 그런데 안명근이 군자금 모금을 빌비로 민족지도자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황해도 일대의 민족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구금했는데, 해서교육총회 지도자들도 이 사건으로 모두 검거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해서교육총회사건인데,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때 도인권은 10년 형을 언도받고 6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일본 경찰관이 불당(佛堂)을 건축하고 모든 죄수들에게 분향배례(焚香拜禮)를 요구했으나 도인권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여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가출옥 조치를 허락했으나 출옥시키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형기를 다 채우고 풀려났다. 

  출감한 도인권은 평양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8년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 군사국장, 무관학교 교관·학도대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상해거류민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에는 고려혁명위원회에 가입하여 시베리아로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2년 10월부터 남감리교회에 소속하여 외수청(外水淸) 구역을 담임하였고, 이후 시베리아지방의 선교사업에 투신하였다. 1929년에는 소련 공산정권의 종교 핍박을 피해 교인들과 함께 중국 훈춘(만주 간도)의 동흥진으로 도피하여 여기서 6개의 교회와 5개의 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동흥진교회의 담임으로 시무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당시에는 무장을 하고 떠를 지어 다니던 공산당 비적(匪賊)들에게 잡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일본군 토벌대장의 도움으로 석방된 일도 있다. 이때 도인권 목사와 교회는 도인권 목사를 구해준 토벌대장인 다케모도(竹本) 헌병대장에게, ‘일본 황군 헌병대장 다께시모(竹下)에게 감루(感淚)를 금치 못하며’ 라는 제목의 감사장을 보낸 바도 있다. 이를, 일제의 가혹한 정치보다 공산당의 잔혹이 더 심했다는 의미라고 민경배 교수는 해석했다. 또 일본 감리교 신자로서 훈춘 영사관 부영사로부터 파괴된 예배당 재건비 60만 원을 받아 교회당을 재건축하였다고 한다.

  만주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한 도인권 목사는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고난 중에서도 구령사업을 계속하여 많은 신자를 얻었고, 그가 관여한 동흥학교도 크게 발전하였다. 10년간 동흥진에서 일한 도인권 목사는 1939년 6월 간도의 연길구역으로 파송되어 연길교회와 유치원을 설립하여 해방 당시까지 시무하였다. 해방되던 해 10월 귀국한 그는 3.1동지회를 조직하여 대표로 일하다가 황해도 옹진으로 가 한국독립당 옹진지당부 지도책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옹진지부장으로 봉사했고 또 옹진중학교도 설립하였다. 1947년에는 옹진읍교회를 담임하며 목회하다가 1950년 6.25전쟁 당시 공산학정을 피해 월남하였다. 감리교의 제주도 선교사업이 시작되면서 제주도로 이동한 그는 1957년 4월까지 7년간 시무하면서 제주중앙교회 등 7개 처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제주지방 감리사로 재직하였다. 민족의 수난기에 한국과 만주, 황해도와 제주도에서 반공주의 신념으로 살았던 한 목회자의 여정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민족과 교회의 역사를 헤아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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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상해임시정부 군사부장 도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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