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은 1,000년 이상 신분제도가 정착되어서 하층민이 상층의 신분을 갖는다는 것은 운명적으로 불가능했다.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사회 진출마저 막혀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친일파가 득세하고 나라가 무너졌으니 관직이 삭탈 당하고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하면서 서서히 신분제도가 허물어졌고, 6·25 전쟁으로 강토가 폐허가 되자 신분과 빈부격차라는 것은 해체되다시피 했다. 더구나 대한민국, 민(民)이 주인인 세상이 됐으니 신분제도는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국가재건과 함께 일자리 기회와 자식들 공부를 위하여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판잣집, 행상, 공사판 일용직, 파출부를 하면서도 도시로 몰려들었다. 땀, 노동, 노력, 공부를 하면 누구든지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경쟁의 시대를 만들었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인간을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정의하였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도구를 개발함으로 문화를 창조하며 발전시켰다는 뜻이다. 도구는 인간을 ‘노동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동물에게는 노동이 있겠지만 생존을 위한 노동이지 사람과 같은 보람과 의미, 재화 축적과 즐거움의 노동은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노동을 하나님의 징벌 혹은 인간의 죄의 댓가라고 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물론 선악과를 먹은 후에 창세기 3:16-19에 의하면 땅이 저주를 받아서 엉겅퀴와 가시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리고 해산의 고통이 따랐다. 그러나 인간 타락 이전에 인간을 지으신 후 창조주가 처음으로 주신 말씀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는 것이었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사명)을 주셨고,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며’라고 하였다. ‘경작’은 히브리어로 「아바드」(일하다, 봉사하다, 섬기다, 노동하다), ‘지키다’는 히브리어로 「샤마르」(보호하다, 지키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범죄하기 전에 이미 인간에게 노동을 명하셨다. 범죄 이후에 그 노동이 괴롭고 힘들게 됐을 뿐이다. 현대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이 주중에 열심히 일하고 주일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하는 기쁨, 일터가 있음에 감사, 노동의 가치와 신성, 나아가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직업소명론(천직)을 깨달아 단순히 재화를 얻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말씀처럼, 노동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는 인생으로, 땀 흘리는 기쁨, 봉사하는 삶으로 살아가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