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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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에게 늘 불만인 아들이 있었다.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자는 아버지의 말씀을 뒤로하고 아들은 휑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다음 날도 학교에 가기 전에 용돈을 달라고 투정을 부리다가 도시락도 버려두고 학교로 가버렸다. 아들의 어머니는 ‘돈이 중하냐? 아들이 중하냐?’ 하고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버지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하루 종일 불편하게 지낸 아들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건축 현장 앞을 지나는데 자기 눈을 의심할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공사판에서 벽돌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 아들은 되돌아 건축 현장으로 가보았다. 분명 아버지였다. ‘회사에 출근하신 아버지가 왜 저기서…?’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어머니도 몹시 놀라 회사로 전화를 했다. “김 계장님 지난 달에 명예퇴직 하셨는데 사모님은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여직원의 답변을 들은 아내는 너무도 황당했고, 아들과 함께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남편은 퇴직한 사실을 숨기고 막노동판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 말쑥한 정장을 입은 남편이 약간의 취기에 어려 돌아왔다. 아내가 자리에 앉는 남편 앞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말했다. “여보, 미안해요. 오늘 동혁이가 당신이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봤어요. 당신은 가족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회사를 그만 둔 사실을 말하지 않았더군요. 가족 간의 진정한 사랑이란 힘든 것도 함께 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혼자 힘든 시간을 보낸 거예요.” 아버지 앞에 아들이 무릎을 꿇었다. “아빠, 죄송해요.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리고 교회도 나갈게요.”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취기어린 한 마디를 한다. “미안하다 아들아, 남들처럼 훌륭한 애비가 못되어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에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교훈이 있다“父兮生我, 母兮鞠我, 哀哀父母. 生我劬勞, 慾報深恩, 昊天罔極<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아 애달프고 슬프도다.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애쓰고 수고하셨도다.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하늘도 다함이 없도다>.”

이 애틋한 마음을 한자에서는 親(어버이 친)이라 한다. 어버이 친자는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아들(子)을 보고 있는(見) 모습을 뜻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형상인가? 어버이 친(親)에 버금가는 한자가 ‘효도 효(孝)'자다. 즉 노인을 업고 오는 아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한자의 모습, 親 자와 孝 자가 가정에 있을 때 그 가정은 복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는 것이 지고한 효도다. 기분 좋고 마음 내킬 때 부모님께 잘 해 드리기는 쉽다. 그러나 끝까지 편하게 모시기는 참으로 어렵다. 가끔 찾아뵙고 잘 대접하기는 쉽다. 그러나 매일처럼 찾아뵙고 대접하는 일은 쉽지 않다. 효도는 관계가 아닌 이해에서 진정한 효행이 시작된다.

나에게는 김기수 목사님이 믿음의 아버지이다. 나의 약혼과 결혼주례를 해 주셨는데 어르신이 소천하실 때까지 35년간 늘 찾아뵙고 축복기도를 받는 것이 나의 결혼기념일 행사였다. 관계보다 이해의 행동하는 효도였다. 지난 삼월과 사월은 미국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귀국하니 5월이다. 담임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맺은 부목사님들과의 관계로 그들은 모두가 내 아들 딸이었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라고 해마다 찾아온다. 언제나 그렇지만 만감이 교차된다. 지극함으로 뒷바라지를 했던 자식 같은 아이들은 소식이 없지만 제대로 돌보아 주지도 못했던 아이들은 해마다 변치 않고 찾아주니 그렇다. 섬김과 사랑은 관계가 아닌 이해에서 행동하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오래 전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밤중이었다. 장로님의 아들이 술을 마시고 목사관을 찾아왔다. 아버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차서 넘치고 있었다. 그 아들을 붙들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했다. 그 때 내가 그 청년을 품에 안고 던진 마지막 질문 하나가 있다. “아버지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니?” “……?” 서서히 술이 깨던 아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눈빛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외롭고 쓸쓸하고 고뇌에 찬 눈빛을 나는 보았다. 장로님이고 사회적으로도 괜찮은 위치에 있으며 돈도 많고 모든 면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아버지의 눈빛이 왜 그리도 외롭고 쓸쓸할까? 나는 많은 생각을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겠구나. 그것은 바로 너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 아들은 내 품에서 울기 시작했다. 언제 술에 만취가 되었던가 싶게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달라진 것을, 그 아들도 달라진 것을 나는 나의 목회 현장에서 경험했다.

오늘의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눈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못 볼지도 모른다. 아니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식들의 눈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천만 마디의 말을 쏟아내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따뜻한 눈빛교감은 전혀 없이 살아간다. 죽고 난 후 눈을 감고 관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는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눈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일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 어머니의 눈빛을 본 자식이라면, 자식들의 눈빛을 본 부모님이라면 그 다음 말은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눈보다 정직한 표현을 하는 지체는 없다.

전국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 사역을 하면서 내가 하는 마지막 한마디가 있다. 목사에게 묻는다. “성도들의 눈빛을 보았느냐?”고, 성도들에게 묻는다. “목사의 눈빛을 단 한번이라도 보았느냐?”고. 질문을 들은 회중들 대부분이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고개가 숙여지고 눈시울이 젖어들고 여기저기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 같은 자들의 당이 만들어지면 그들은 철연장으로 소란을 피우고 망치로 두드리고 도끼로 찍는 그런 공통점이 있다. 상황에 함몰되어 말씀을 잊어버리고 서로의 눈빛조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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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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