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에 의해 만주에서 죽임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장로교의 한경희 목사였다. 한경희(韓敬禧, 1881-1935) 목사가 북만주의 호림현에서 순행 전도하던 중 오소리강에서 공산 공비 40여명을 만나 목사임이 드러나자 총에 맞아 죽었고 얼어붙은 강에 던져졌다. 1935년 1월 4일이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 말살을 의도했다고 하지만 같은 민족의 공산당이 더 악독했다. 이 참화를 듣고 총회 전도국은 송창근 박사를 보내 북만교회를 시찰했는데 그 보고를 받은 김인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북만주교회는 순교의 피로 쌓은 교회다. 우리는 북만의 순교자라면 한경희 목사만을 알되, 한 목사 이외에도 순교한 신자의 이름은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잔악을 극(極)한 공산당에게 몽치에 맞아 죽은 순교자, 정수리에 못 박혀 죽은 순교자, 머리 가죽이 벗겨 죽은 순교자, 말 못할 학살을 당한 여 순교자, 기십 기백에 달하였다 한다. ...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여서도 김현점(金炫漸) 목사와 같이 공산당에게 살을 찢어내는 핍박을 당하는 등 여러번 사경에 출입하는 이가 많다. ... 만주에는 교회가50여 처, 교인이 3천여 인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7목사, 20여 장로의 아름다운 노회를 이루어 전진도상에 있다하니 이는 눈물로 땀으로 땀으로 터 밖은 교회요, 피로, 순교의 피로 세우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성신이 사도 대와 같이 역사하는 교회이다. 만주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자, 만주교회를 위하여 연보하자. 만주에 전도하자.”
한경희 목사는 1881년 음력 11월 5일 (양력은 12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남시리(구 의주군 양광면 송정리)에서 아버지 한승주(韓承周)와 달성(達成) 서(徐)씨 어머니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탐관오리들에 의해 수탈을 당하자 가세가 기울어 져 4세가 되던 1885년 가족들은 양서면(楊西面)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수재(水災)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평안도 북부지방을 전전하며 지내 던 중 한경희는 19세가 되던 1900년 신효정(申孝正)의 장녀 경원(敬元)과 혼인했다. 그러던 중 1903년 동문외교회(東門外敎會) 전도인 송문정(宋文正)이 전해 준 『구세론(救世論)』을 읽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그해 10월 첫 주일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자 가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인내하였고, 후에는 자신을 핍박하던 맏형 한찬희(韓燦禧)도 회심하였고 후에는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한경희는 23세가 되던 1904년 6월 22일 동문외교회에서 학습을 받았고, 그 해 11월에는 서리집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16일에는 이 교회에서 선교사 계인수(Carl E. Kearns, 桂仁秀) 목사로부터 부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동시에 집사로 피택 되었다. 이후 그와 함께 전도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7월에는 동문외교회의 영수로 선출되었다. 영수가 된 그는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고 창신학교(昌新學校) 속성반에 입학하여 6개월 후에 졸업했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이 학교 교장이 되었다고 한다. 인근 주민과 학교 직원들ㅢ 신뢰를 받고 교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한경희는 1909년부터는 고난 속에 살아가던 만주로 눈을 돌려 훌루투(葫蘆套)와 자피구(夾彼溝)에서 전도하여 두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1910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4년 5월 15일 동료 17명과 함께 제7회로 졸업했다. 33세 때였다. 그해 8월 7일에는 양전백(梁甸伯, 1869-1933) 목사에 의해 중국 길림성(吉林省) 중동선(中東線) 지역 전도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그는 만주 지방 전도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쿡(Welling T. Cook, 鞠裕致, 1878-1952)의 기록에 의하면 1920년 당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50만 명에 달했다.
한경희 목사는 마적(馬賊)의 출몰하고 일제의 위협과 수탈,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는 마주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전도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영안현(寧安縣) 신안촌(新安村), 석두하자(石頭河子), 위하현(葦河縣) 일면파(一面派), 목릉현(穆稜縣) 목릉(穆稜), 팔면통(八面通), 그리고 밀산현(密山縣) 백포자(白泡子), 십리와(十里窪) 등 일곱 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5년 후반 한경희 목사는 서간도(西間島)의 전도목사로 임명되어 온가족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사하여 삼원포, 해룡(海龍), 동풍(東豊), 서풍(西豊), 휘남현(輝南縣)의 5개현을 담당하였다. 개척 전도자 한경희 목사는 고결한 인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고, 나중에는 방기전(方基典, 1861-1920)이 1912년 10월 설립한 은양학교(恩養學校)의 2대 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교회 개척과 전도 외에도 교육사업에 관여하였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3월에는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3년 2월 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때 ‘아리랑’이란 소설로 유명한 김산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1월 29일 출옥한 이후 창성읍(昌城邑) 교회와 평로동(坪路洞) 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하였다. 한경희 목사는 길림성 동북쪽에 위치한 호림(虎林), 요하(饒河), 수원현(綏遠縣) 등에서 사역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곳으로 자원하여 갔다. 친구들은 그곳은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라고 여기고 1933년 북만주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그는 1935년 1월 1일, 교인 4명과 함께 북만주 호림현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는데, 1월 4일 오소리강(烏蘇里江) 소목하(小木河) 지점에서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잡혔다. 그들은 한경희 목사에게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2시간 동안 구타하고 그와 4명의 교인을 총살하고 시체를 얼어붙은 강 속에 던졌다. 한경희 목사의 순교는 조선 전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후에 손양원 목사는 설교하면서 한경희 목사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로 1941년 11월 4일 피체되어 광주 지방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참 신앙은 고난이라 시련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얻는 것인 고로 우리들은 이 고난을 이기고 신앙을 점점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때를 당하여 현하(現下) 교회는 사랑과 지혜와 용맹을 가지고 일하는 교역자를 요구한다. 우리 조선 기독교 교역자는 모두들 순교자 한경희 목사와 같이 순교 정신으로 선교에 종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경희 목사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만주의 사도바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