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2-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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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준 대표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하며 구호활동을 펼친 재미교포 배병준 집사(미국 코너스톤교회, TWP 대표)를 만났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북한에서 활동한 구호활동가,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영화 프로듀서, 최근에는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한 작가이다.

 

성공한 사업가

배병준 대표(85)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10대 때 6.25전쟁으로 남하했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기억할 만큼 잔혹한 추위 속에서 살기 위해 아무것도 먹지 않고 6주 동안 계속 걸었다. 서울에 도착해 살았다고 안도할 틈도 없이 서울에 있던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난가고 있어, 배 대표의 가족들도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고 4일간 이동해 1950년 12월 31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미군기지에 텐트를 치고 경기고등학교 수업을 들었다. 이후 서울로 다시 가서 졸업을 하고 195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생활비 마련을 위해 여러 일을 하며 학업을 병행하다보니 졸업까지 6년이 걸렸다. 그렇게 기계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회사에 취업했다. 처음엔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판매부로 들어가 많은 실적을 올리면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후 펜실베니아에 자신의 회사를 세웠고, 직원 600여 명이 전부 미국인이었다. 당시 가난한 지역이었던 곳에 회사를 설립하고 일자리 창출과 매출이 올라가자 상원의원, 하원의원이 지역 발전에 도움을 줘 고맙다는 인사까지 건넸다. 배 대표는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CEO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북한 구호활동가

어느날 북한 어린이 10만명이 굶어 죽는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고향을 찾은 배 대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가보니 실제로 아이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았고 작은 고향 동네에 고아원은 왜 이리 많은지 참혹할 뿐이었다. 배 대표는 “부모가 굶어 죽어 보육원으로 옮겨진 아이들이 많았다. 좁은 고아원에 팔다리는 앙상하고 곪아서 배는 볼록한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시체가 떠다니는 강에서 물을 퍼다 마시니 병이 날 수밖에 없었다. 고아원에는 일할 남자도 없어서 여자 간호원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자르지는 못하고 나무껍질을 모아오는데, 손에 피가 나도록 나무껍질을 벗겨 왔다”면서 “그래서 나무를 자를 전기톱을 사다 주고 아이들이 먹을 것을 마련해 주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죽는 것만 보다가 왔다. 겨울엔 땅이 얼어 시체를 헛간 옆에 쌓았다가 봄이 오면 땅을 파고 묻는다”며 처참한 당시 상황을 전달했다.

배병준 대표가 지속적으로 후원을 하고 돕길 2-3년이 지나니 아이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아는 물론 청소년들도 돕기 위해 빵공장을 세웠다.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있었는데 어느날 한 아이가 빵을 잘라다 몰래 부모를 가져다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배 대표는 고아원만 도와서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농사를 돕기로 했다. 함경북도는 춥고 척박한 땅이라 흙이 달라 씨앗과 비료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두만강 건너 중국과 흙이 비슷해 좋은 씨앗과 비료를 구입했다. 또 중국에서 농업 전문가를 고용해 데려가 북한 주민들에게 2년간 농사법을 가르쳤다. 이를 시행하기 위해 어려움도 많았다. 북한에는 지역마다 납품해야할 분량이 정해져 있는데 자칫해 이를 맞추지 못할까봐 주민들이 반대했다. 하지만 배 대표의 끈질긴 설득 끝에 농사법을 변경했고 결국 성공했다. 당시 쌀 수확량이 북한 사리원 6톤, 전라도 8톤 정도였고 배 대표가 있던 함북 지역은 1톤 정도 수확했지만 농사법을 변경한 뒤 5톤의 쌀을 수확하게 됐다.

1997년부터 북한을 돕기 시작해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북한에 50번 이상을 다녀왔다. 식량, 의복, 의약품 등을 보내고 폭우로 북한에 피해가 크다는 뉴스를 들으면 수해 복구 지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동안 사비로 북한을 도운 금액만 약 700만 달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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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 너머 마을'의 한 장면.

 

상을 휩쓴 영화 프로듀서

북한을 방문한지 10년이 지났을 무렵 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정이 들었다. 그들을 전도 할 수 없었지만 배병준 대표가 혼자 기도하는 것은 허락해주었다. 어느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기도를 허락해주자,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배 대표도 믿음이 있었기에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소리 내어 기도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농사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북한 주민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렇게 20분가량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 다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도하는 말씀이 아름답다’는 주민들의 말을 계기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쓴 것이 소설로 변하고 영화 시나리오가 되었다. 6.25전쟁 당시 남한 군인과 북한 간호사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산 너머 마을’의 각본을 쓰고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미국교포와 북한 정부의 최초 합작 영화인 ‘산 너머 마을’은 평양, 신의주, 개성 등 북한 현지에서 촬영이 이뤄졌으며 영화배우와 스태프도 모두 북한 사람들로 구성됐다. 이 영화는 하와이영화제를 비롯한 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배 대표는 “영화 촬영을 위해 북한을 자주 가게 되었다. 사상의 차이로 갈등도 있었던게 사실이지만 여러 차례 설득한 끝에 의도대로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배병준 대표에게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은 어머니와 아내이다. 두 분 모두 믿음이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배 대표에게 큰 사랑을 알게 해 준 여인들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배 대표에게 “언젠가 고향에 가서 교회를 지어라, 학교를 지어라”는 유언을 남겼고, 아내 역시 “내가 죽더라도 고아원 사역을 계속해달라”, “북한 영화를 남한 형제들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비록 북한에 교회를 짓지는 못했지만 학교를 지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고, 북한 고아들을 위한 후원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산 너머 마을’이 북한 영화라서 한국에서는 상영을 하지 못하다가 지난 2018년 한국 울주국제영화제, 2019년 평창 남북평화영화제 및 판문점에서도 상영돼 마침내 아내와의 약속도 지키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인생을 담은 회고록 ‘약속’이 출간됐다. 어머니와 아내와의 약속을 이루려 살아온 재미교포 사업가 이야기 ‘약속’이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배병준 대표는 “85세의 나이가 되면 바닷가에 앉아 태양이 지는 걸 봐야겠지만, 난 아직 태양이 뜨는 걸 보고 싶다. 책을 쓰고 싶고 각본을 써서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젊은 사람들에게 통일이 되어야하는지 이야기 하고 싶다”면서 “세상을 떠난 다음에 천국에서라도 통일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나의 노력이 바다의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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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준 대표의 회고록 '약속'이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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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준 대표는 지난 3월 24일 피난 시절을 회상하며 부산영락교회를 찾았다. 이날 담임 윤성진 목사를 만나 그의 삶을 간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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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배병준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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