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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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욱 목사(평안교회)

지식홍수의 사회에서 알고자 하는 것은 검색엔진을 돌리면 된다. 검색엔진을 돌리면 빅데이터가 순차적으로 배열하여 알고자 하는 지식을 채워준다. 그러나 이젠 검색엔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빅데이터를 이용하여 알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것들을 만들어주는 시대가 되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쳇GPT이다.

 

그림을 그려주고 음악도 만들어주며 심지어 글도 대신 써 준다. 검색이 아닌 대작을 해주는 것이다. 신학 교수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책을 쓰고 강의도 하였다. 학생들은 강의 내용을 인터넷에 올려 빅데이터화 시켰다. 누군가 교수가 내어준 리포터를 하기 위해 쳇GPT에게 묻는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빅데이터가 담긴 리포터를 단 몇 분 만에 받게 된다.

 

이러한 지식의 홍수사회에서 교수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중요한 것들은 빅데이터화 되지 못하도록 다양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입으로 회자 되는 것들과 과거로부터 구전되는 것들이 오늘날의 빅데이터라 하겠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속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복음이 가려졌다. 심지어 예수께선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숨겨달라고 했고 자신이 한 기적과 표적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한 성경 기록 내용을 메시아닉시크릿이라 한다.

 

왜 예수께서 이토록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숨기려 하셨을까?

 

[누가복음 8: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복음학에 정통하신 예수께서 나신 곳이 지방이고 가난한 동네라서 가말리엘 문하생이나 요한의 제자들보다 입지가 없었다. 또 그가 하는 메시지는 당시의 성경에 대한 해석과는 달랐고 그 메시지를 받는 무리는 성전에 접근하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요한의 제자들까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더욱 숨기려 하셨다. 심지어 자기 제자들에게까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가끔씩만 그 말씀을 풀어 주셨다.

 

어느 날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찾아 왔다. 백 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렸다는 소문이 돌자 세례요한이 제자 둘을 예수께 보낸 것이다. 허름한 예수의 제자들 앞에 말짱한 요한의 제자 둘이 찾아와 "세례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길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다. 그리고 덧붙이신 말씀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이때 예수의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 둘을 배웅하러 간 듯하다. 잘 배운듯하고 잘 입은 듯하고 특히 세례요한의 제자라서 더욱 그럴듯해 보이는 요한의 제자들을 배웅하고 온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제자 둘을 보내 당당히 예수께 질문을 던진 요한과 그 제자들의 품격에 놀라, 자신들이 예수와 함께 한 시간들 속에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순간 잊고, 오히려 그들의 멋진 모습이 실족할 동기가 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고 물으신 것이다.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광나루와 지방 신학대학 그리고 노회 소속의 신학원은 적당한 차이가 있다. 예수는 지방 삼류 신학원 강사였다. 그리고 그의 학생은 열두 명이었다.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던 사울에게도 예수와 그 제자들은 삼류 지방 신학을 하는 이단 사이비였다. 그래서 그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단 척결에 앞장섰다. 그런 그도 스데반의 당당한 죽음 앞에서 한번 놀라고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나 또 놀랐다. 그리고 한순간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유대인의 성서에 포함되지 않아 지금도 그들에게는 가려져 있다. 비록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고 가말리엘 문하생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도 지금의 이스라엘에게는 얼굴을 가린 수건과 같다.

 

그러나 이방에게는 복음의 시크릿이 없다. 오히려 많은 빅데이터가 넘쳐난다. 그 일을 성령께서 하고 계신다. 성령의 일은 메시아닉 시크릿과 같다. 모두에게 일어나지 않고, 또 일어난 일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지 않고, 그래서 모두가 믿는 것이 아닌 일들이, 오늘날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 불씨를 옮기기 위해 은사에 따라 복음을 전한다. 그 복음이 누군가에겐 얼굴을 가리는 수건이 되고 누군가에겐 가려진 눈을 뜨게 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쳇GPT의 홍수를 벗어날 수 없다. 믿는 자들의 빅데이터는 늘어날 것이고 그것을 따라 다양한 창작과 대작과 지식의 홍수가 일겠지만, 그런 중에도 성령은 운행하시며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세우시고 새롭게 하시며 구별해 놓으실 것이다.

    

마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고 가말리엘 문하생이 예수의 제자가 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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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메시아닉 시크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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