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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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필(神筆)’로 불렸던 홍콩의 김용이 쓴 「신조협려」에 보면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절벽 아래로 투신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여주인공이 벌의 날개에 “아재곡저(我在谷底)”라는 글씨를 써서 날려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글자 그대로 ‘나는 골짜기 아래(바닥)에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중국 명문 가문 출신으로 “명보(明報)”를 창간한 탁월한 언론인이었던 저자(본명 사량용)가 신문의 홍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중소설을 연재하면서 느꼈던 남다른 소회를 담아 살짝 흘려보내는 고백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갑자기 이 문구를 떠올린 이유는, 최근 이와는 반대로 “아재상법(我在上法)” 곧 ‘나는 법 위에 있다’는 대담무쌍한 선언을 노골적으로 쏟아내는 듯 행동하는 무리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가 바로 서울 성북구 소재 사랑제일교회 사건에서입니다. 합법적인 재개발지역에 포함된 이 교회는 보상 문제로 조합 측과 다투다가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최종적으로 패소하고 말았지만 몇 차례의 명도집행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방해하여 마침내 조합 측의 굴복을 이끌어 냈습니다. 양측이 협의보상금 500억과 대체 부지에 합의하여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교회의 자칭 목사는 “그래, 나는 대법원 위에 있어”라는 망발을 공공연하게 내뱉기에 이르렀습니다. ‘직접적 아재상법’입니다. 물론 법이라 해서 모두 정당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때로 악법에 대해 혹은 자의적인 해석과 집행에 대해 분연하게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더군다나 ‘프로테스탄트’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신앙도 법치주의 앞에 겸허해야 합니다. 법치주의란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아재상법”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예수님보다 자신이 위에 있다(我在上主) 여기지는 않겠지요?

두 번째도 서초동 소재의 한 교회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에서입니다. 한국교회사상 가장 많은 돈을 들여 건축했다는 이 교회는 세상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본당을 지하에 두고 아동시설 등을 만들어 기부하는 등의 행보를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세계최대규모의 예배당 일부가 공용공간을 침범하여 지어졌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코 고의로 그런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결국 공공도로 점용허가를 내준 구청에 대해 주민소송이 제기되었고, 지난 2019년 10월 17일 대법원은 교회 측의 도로점용은 불법이므로 원상회복하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불법으로 건축된 예배당 일부를 헐어서 공공도로부분을 반환하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곧바로 집행정지 및 행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합니다. 예배당 헌당식에 참가했던 해당 지역 구청장은 “영원히 예배당의 점용허가를 해드리겠다”는 말을 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영적제사장법이 세상법보다 우위에 있다”, 평소 교회 측에서 자주 언급해 왔던 신묘한 화법입니다. ‘간접적 아재상법’입니다.

세 번째는 서울 강동구 소재의 초대형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에서입니다. 소속 교단은 수년 전 목회자세습금지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교계를 넘어 세상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 교회는 부자세습을 시도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팎으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법을 무시하고 이루어진 일이라 더욱 반발이 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단 재판부가 세습무효판결을 내렸으나 총회는 화해수습이라는 명목으로 재차 탈법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금도 세상법정에서 대표자지위의 존재 여부를 둘러싸고 엇갈린 판결이 오가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설립자 목사는 빈궁과 가난을 벗 삼았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마을 형의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에 훗날 큰 선물을 하면서 “주님께 바치나이다, 2003. 11. 30. 작은 종 드림”이라고 수줍게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교단의 법 위에, 교단의 재판 위에 서 있습니다. 말은 안 해도 ‘묵시적 아재상법’입니다.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이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6. 16).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통해 그 자신만은 법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들 교회가 무슨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곧잘 법을 경시하며 유월하니 말입니다. 전술한 “아재곡저”는 원래 “아재절정곡저” 즉 ‘나는 절정곡 아래에 있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소설 속 골짜기가 하필 “절정곡(絶頂谷)”입니다. 높은 절정과 낮은 골짜기의 합성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 내려놓고 쓴 글 때문에 김용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다 갔습니다. 그는 한 때 기독교계열의 학교를 다녔다 합니다. “아재상법”이 아니라 “아재곡저”야말로 예수께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라는 사실을 그도 깨달았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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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아재상법(我在上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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