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8(목)
 


송시섭 교수.jpg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들이 교회가 위안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억압의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는 분석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 부모세대가 이루어놓은 물질적 풍요와 휴대폰 속에 넘쳐나는 대중문화의 유혹은 극심한데, 21세기의 삶을 사는 자신들에게 여전히 19세기의 방식을 주입하는 어른들에 대하여 문화적 격차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는 청년들도 예외가 아닐 것인데,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복음의 본질을 듣지 못하거나, 설교가 자신들의 삶의 고민과 동떨어진 다고 느낄 때라고 한다는 점은 뼈아픈 현실이다.

 

그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올 수 있는 다양한 해결방안에 대하여 모두 동의하면서 필자는 작지만 의미 있는 제안을 한 가지 더하고자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성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다소 오래된 미국의 통계이긴 하나, 1991년 바나 리서치(Barna Research)가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들은 정확무오하다’라는 언술(言述)에 대한 동의 여부를 질문했을 때 46%가 강력하게 동의했는데, 2016년경에는 같은 조사에서 30% 정도만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결과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한다면 위험한 추정일까. 아마도 청소년, 청년들은 성경에 대한 다소 고루한 인식, 즉 성경은 교조적이며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고지식한 명령들로 가득 찬 낡은 법률 서적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성경은 생각보다 열려 있고, 타협적이며, 각 시대의 역사적 소명의 맥락을 읽는 깊은 통찰을 보여주며, 동시에 또 다른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고 있는 책이라는 점은 젊은 세대에게 잘 전달되지 못한 면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例)가 바로 레위기의 희년(禧年, jubilee)규정을 읽을 때다. 성경은 희년규정을 설명하면서 ‘무르기’(redemption)에 대한 대표적인 예외로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dwelling house in walled city)에 대하여는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허용한 뒤 그 뒤로는 무르기가 불가능함을 천명하고 있다.(레위기 25장 29-30절)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읽다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융통성’을 보게 된다. 그 중 한 견해는 성벽 있는 성내가옥은 주로 부자들의 소유물이므로 희년의 취지인 약자들의 생존권보장의 보호범위 밖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허용해줌으로써 부자도 주택 무르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조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다른 견해는 희년이 일방적인 분배철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보다 유연한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있으며 더구나 1년이 지난 가옥의 경우 매입자가 새롭게 형성한 부가가치를 인정하여 매도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 성경은 우리의 청소년, 청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세밀하고 정치(精緻)하며 놀라울 정도의 현실적 구체성을 띄고 있으며, 시대적 배경과 경제 사조까지 반영한 아주 합리적인 책이라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성경 속 이야기를 위인과 기적위주로 전달할 때 청자(聽者)는 그 본래 취지에 맞지 않게 성경을 영웅위주의 차별적이며, 신중심의 권위적인 문서로 이해할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참으로 유연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에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있는 놀라운 합리성을 갖고 있는 책(冊)임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를 제공해주며, 천국과 구원에 대한 영적인 진리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깊은 깨달음을 전해준다는 점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새로운 성경해석에 대한 열린 자세를 늘 강조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선생님은 결코 성경을 묵고 굳은 계명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요즘, 다양한 대책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지금, 어쩌면 미래세대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전략은, 성경에 대하여 ‘알기를 감행하는’(dare to know) 칸트의 제안을 실행해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에 바로 이 지점에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외친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조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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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교수]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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