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9-29(목)
 

서임중 목사.jpg

역사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고난의 날을 경험하지 않은 자는 없다. 그래서 苦尽甘来(고진감래)라는 말이 명구가 된다. 고진감래의 반대어로는 興尽悲来(흥진비래), 곧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뜻으로 세상은 돌고 돌아 순환됨을 이르는 말이 있다. 하여 인생을 塞翁之馬(새옹지마)라고들 한다.

전국 교회의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할 때마다 회중에게 묻는 말이 있다. “제가 고생한 사람 같이 보입니까?” 그럴 때면 거의 이구동성 ‘아주 귀한 가정에서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자란 사람 같다’고들 한다. 그러나 둘째 날 저녁에 필자의 간증을 들으면 여출일구 “아이구 세상에나, 아이구 세상에”를 연발하며 필자의 지난 고생에 감정이입이 되어 함께 아파한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이렇게 행복한 삶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필자에게 모두 진심의 박수를 보낸다.

부흥사경회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역이 더욱 보람된 것은 고난가운데 힘들고 지쳐 좌절과 우울증으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소망을 갖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 소성하는 사람은 목사나 성도나 차등이 없다. 고희의 세월을 걷는 부흥회 인도가 때로는 지치고 일어서기 벅찬 시간도 있다. 그러나 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복되는 양떼들을 보며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 오늘도 감사의 옷깃을 여미며 말씀사역을 현재진행형으로 써간다.

‘광야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곧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삶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광야(曠野)’라는 원문은 ,מִדְבָּר(미드바르)’이다. 그것의 헬라어는 ἔρημός(에레모스)’로 번역이 되었다. 넓은 들판으로서 거친 땅, 빈들, 사막 등의 여러 가지로도 번역되는데 불모(不毛)지인 ‘씨 뿌리지 못하는 땅(렘 2:2)’, ‘사람 없는 땅(욥 38:26)’, ‘짐승이 부르짖는 황무지(신 32:10)’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사람이 살기 어려운 상황을 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무 인적의 광야가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뵈옵는 장소이기도 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 시험을 받으셨다. 나아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다. 이 같은 광야의 시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피할 것만은 결코 아닌 필요한 시간이다. 이 광야의 시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더 깊이 있는 삶을 위하여는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교훈임을 깨닫게 된다.

사노라면 오늘의 삶이 광야 같아서 우리를 힘들게도 한다. 육신의 아픔도, 일상생활의 어려움도, 인간관계의 모든 범사도 때로는 우리를 주저앉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우리를 거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으로 가는 길목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고난인 광야의 시간을 만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인생에 필요한 광야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깨달음의 은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의 시간도 ‘이것은 내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광야의 시간’임을 깨닫고 극복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극복하는 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눈으로 가능하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고 말씀하셨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 산맥에서 자라는 장미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 최상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밤중에 따는 장미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격과 신앙의 향기도 극한 고난의 밤, 절망과 아픔의 광야의 시간을 통과하며 발산되는 것이다. 같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한 사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어두운 벽을 바라본다. 광야의 시간에서도 희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성공자가 된다. 보리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이나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는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 없고 겨우 80알 또는 90알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농부는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는 보리밟기를 한다. 이 때 허약한 싹들이 모두 꺾이고 다시 일어나는 싹들은 밟히기 전보다 훨씬 강한 줄기가 되어 수백 알이 달리는 보리알도 넉넉히 받쳐 결실한다고 한다.

요셉은 13년의 광야 같은 시간도 포기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았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센 믿음으로 나아가 애굽의 위대한 총리가 되었고 축복의 반열에 섰다.

탈무드 속의 이야기 한 토막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가고 있었다. 날씨는 타는 듯 뜨거웠고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저는 힘이 다 빠진데다가 목이 타서 죽겠어요.” “아들아 용기를 내어라. 우리의 선조들도 이 고통의 길을 다 걸어갔단다. 이제 곧 마을이 나타날 거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이때 그들의 눈앞에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아버지, 저것 보세요, 우리 선조들도 여기서 모두 죽어갔지 않아요. 도저히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아들아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은 이 근방에 동네가 있다는 표시다.”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거기에 희망도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다.

밤도 사경이면 아침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겨울에 제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제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제비는 다시 돌아온다. 한겨울 앙상한 가로수를 보고 그 나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다시 싹이 나고 푸른 나무가 되기 때문이다. 안개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좋은 섬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고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변함없이 대지에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사노라면 광야에 들어서는 시간도 있다. 어떤 이는 밤 4경 고난의 막바지에 이르게 될 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는 곧 날이 밝고 해가 뜬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겨야 한다. 고난이 닥칠 때 절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일생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야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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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광야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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