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들고 앉아 있는 사울은 고립무원이다. 사방팔방이 적들로 우글거린다. 처음에는 다윗 한 명만 적이었는데, 적 곁의 적이 하나둘 늘어난다. 듬직한 요나단은 다윗을 구명하는 탄원을 하지 않나, 신하 중에 언제부턴가 다윗에 줄을 대지 않나, 어찌 키운 내 딸인데, 그 죽일 놈을 사랑한다니. 최악은 그도 그가 사랑스럽다. 신앙 좋지, 인품 좋지, 실력 좋지, 뭐 하나 나무랄 것도 없는 그가 충성심도 단연 최고다. 사울은 만인에게서, 자신에게서 스스로 소외되었고, 그런 다윗이 밉고, 그런 자신이 미워 죽을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선택받은 왕인 사울이 왜 버림받고 실패했는지, 가족과 장인과 아내에게서 홀대받던 다윗은 추앙받는 최고의 왕이 되고, 군주의 모델이 되었는지, 그 갈림길이 어디인지 퍽 궁금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자 건국자가 아닌가? 그 정도면 태조 왕건, 태조 이성계급인데, 그의 최후는 너무 쓸쓸하고 아리다. 무엇이 그를 무너뜨렸을까? 그는 지금이라도 제정신 차리고 예의 그 용감무쌍하고 총기 넘치는 초기의 사울로 돌아갈 순 없을까?
창을 들 것인가, 시를 쓸 것인가? 분노, 시기, 적대감과 열패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둘을 갈랐다. 다윗이라고 그런 감정이 없을 리 만무하다. 시편을 보라. 폭력으로 분출하느냐, 일기장에 털어놓느냐의 차이일 뿐. 그 무언가에 들들 볶이고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을 때, 한 사람은 창을 던졌고 또 한 사람은 시를 썼다. 던진 창은 부메랑이 되어 자기 배에 꽂혔고, 외롭고 무서울 때 그 감정을 글로 남겼더니 절창이 되었다. 운명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결정한 것이다. 창을 던질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 선택하라. 그것이 그대의 데스트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하나의 대명사요 고사성어로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동안, 내내 전달되고 전파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여인네들의 춤과 노래가 없을 수 없다. 그것이 사울의 심기를 건드린다. 다윗은 만만이고, 나는 천천이라. 그의 전공에 비해 10분의 1이잖아. 그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나는 바닥을 치면, 왕좌가 위험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다. 일거수일투족을 의심하고 호시탐탐 염탐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를 죽여야 내가 산다.
사울은 비운의 왕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길, 인간 왕이 다스리는 국가의 길을 열어야 역사적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러나 선례가 없다. 비교 대상이 없다. 남의 나라는 모방하지 말고, 하나님을 모방하라는데, 뭔가 손에 잡혀야, 눈에 보여야 배우든, 따라 하든 할 텐데.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앞길에는 아무도 없고, 그가 맨 앞에 홀로 섰다. 뒤에서는 다윗이 맹추격하는 중이다. 나아가 길을 열 수 없다면, 돌아서 다윗을 쳐내는 수밖에.
사울은 비교 대상을 잘못 골랐다. 나와 남을 비교할 것도, 나의 최악과 남의 최고를 견줄 것도 아니다. 나의 장점을 무참히 깎아내리고, 남의 장점은 한없이 우러르고, 나의 단점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남의 장점은 망원경으로 숭배할 일이 아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라. 내가 내게 기준이다. 나는 나다. 나는 딱 하나다. 비교 불가의 존재다. 대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비교하라. 어제는 백백, 오늘은 천천, 내일은 만만이 될지니. (삼상 1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