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두 정씨가 3월 봄 날씨에 하늘나라로 갑자기 이사를 가다니, 모두들 놀라기도 하고 너무 충격적인 죽음의 부고를 접했다.
우리는 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잊고 살아가고 있다. 죽음은 말이 없다. 살아 있을 때는 별로 탐탁치 않다가 병원과 요양병원에 갔다고 하면 그때사 죽음의 그림자가 차츰 가까이 자기 곁으로 오는 것을 실감 할 수가 있다.
평소 한국교회나 부산교계 복음의 열정과 헌신으로 힘써 일한 두 거목 정필도 목사, 정금출 장로를 떠나 보내면서 그 분들의 헌신을 일일이 소개는 못드려도 필자가 알고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짚어 보고자 한다.
정필도 목사(82세)는 1975년 수영로교회를 개척하기 전 경기고교,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공군 군목 출신으로 초량교회 정태성 장로의 2남 정해찬 장로가 수영만에 태광(주) 목재상을 경영할 때 창신대 총장을 역임한 강병국 장로와 함께 태광공장 내에서 첫 개척예배를 시작한 것이 효시였다.
한때 잘 나갈 시기인 1990년~2000년대에 그 교회 교수 장로 한 분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헤어질 때 개척한다는 명분으로 개척비 얼마를 주고 나갔다.
그때 그 시절 분쟁이 있던 교회를 취재에 응해 주어 감사했다. 좀처럼 잘 응하지 않는데 대화를 나눈 것은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필도 목사는 새해 되면 시무장로들과 만나 가슴과 가슴끼리 포옹을 하면서 기도하는데 왠일인지 문제의 k장로와 맞대어 기도하는데 가슴이 차가운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 분이 나를 멀리하는구나 하고 마음 속으로 느겼을 그 시기에 목회에 태클을 걸고 나와 과연 그렇구나 하고 이 분과 헤어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좋게 개척명분을 주어 나간 적이 있었다고 사사건건 목회에 걸림돌이 되면 목사가 나가던지 장로가 나가던지 둘 중에 한 분은 교회 부흥을 위해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목사의 목회 철학이다고 했다. 정목사는 하루에 4시간 이상 기도하는 목사로 유명하다. 그만큼 기도의 영감에서 오는 텔레파시가 정목사로 하여금 헤어져라는 성령의 암시를 받아 그렇게 했다고 실토했다. 정목사는 목사가 기도하는 만큼 교회를 성장시켜 준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부기총(부산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을 역임하고 나서 바로 그 다음 해 부산성시화운동본부를 설립했다. 부기총 가지고는 부산 복음화는 이룰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부산성시화은동본부를 수영로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기금을 만들었다. 지금 부산은 이 성시화운동본부의 역할이 부산 교계의 복음의 중심추 역할을 하고 있다. 부기총은 산산히 둘로 나눠 져도 성시화는 초교파적인 연합체로 하나로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은 정필도 목사의 강한 리더쉽 때문일 거라 생각이 된다. 역사를 창조한 위대한 인물은 역사적 존재요 사회적 존재 가치가 돋보인다. 교회 부흥은 그의 위대한 행동과 사상으로 살아 왔다는 흔적이 이를 말해 준다. 성시화운동본부는 57차 지역 교회별로 전도운동을 해오고 있다. 정목사가 뿌려놓은 씨앗이 열매를 맺어 수십배 결실을 맺었다. 정목사의 사상의 안목은 평소 깊은 기도의 열정이고 그의 시대 정신이요 행동 철학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한국교회가 몇 명의 지도자가 있어 초기와 같은 일제강점기에 걸쳐서는 이른바 빛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 규정하고 싶다. 그가 남기고 간 귀한 업적은 부산교계에 귀한 복음의 밑거름이 되고 한알의 밀알이 되어 열매를 지금도 맺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부산교계에서 폭발적으로 출석교인 3만 명으로 교회를 부흥 성장 시킨 기록을 아직 그 어느 교회도 추월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들, 사위도 목사이지만 목회 세습은 꿈도 꾸지 아니했다. 딸 둘 은 음악을 전공했고, 아들은 목회자, 본인은 2011년 10월, 36년 목회 은퇴 후에 전국 교회에서 부르는 곳에 가서 은혜 목회 노하우로 부흥회를 인도한 그의 복음적 열정은 후배 목사들도 본 받아야 한다.
▲정금출 장로 (당87세), 한 때 대한 학원을 운영했다. 후에는 건설업에 잠시 경영하다가 마지막은 성구사를 운영하는 가운데 둘째아들에게 맡겨 운영하고 있다. 금출이라는 이름이 금출이라 해서 복이 나간다고 했다. 자기는 돈이 자기로부터 빠져 나간다고 해도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귀하게 쓰여지면 그게 복이다고 이름을 개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교단지 “기독교보”를 연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교단내 두 정치적 산맥인 부곡파와 돼지파가 있었는데 부곡파의 수장 진주교회 원로 이금조 목사의 막강한 지지와 후원을 받아 오랫동안 연장할 수 있었다. 중앙 무대는 한기총 공동회장으로 부산교계는 부기총을 창립할 시 멤버이고 서기에서부터 사무총장까지 5번이나 독점하다 싶이 했다.
부산 교계는 그를 마당발이라고 별명을 붙여 왔고 부산기독실업인회 창립 멤버로 고 정태성 장로 성창기업 총수에 잘 보여 부산YMCA 임시 과도기 총무까지 했다.
아들 둘 중에 의식있는 큰 아들이 대학시절 군사 유신시절 데모를 하여 중부경찰서에 잡혀 왔었다. 필자가 잘 아는 정보과 윤형사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방면한 적이 있다. 이 아들이 동일교회 장로가 되고 덕원 고교에 교사로 출발하여 교장까지 역임한 숨은 이야기는 필자만이 아는 비하인드 스토리이다. 두분은 하늘나라 주님 품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며 기뻐하시고 계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