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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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니, 뭐니 하는 것에 시큰둥한 이들이 있다. 어제와 오늘이 무엇이 다르며, 작년과 올해가 어떻게 구분되겠나. 나 역시 그렇다. 다를 것 하나 없다. 똑같다. 괜히 요란 떨 것 없다. 그럴수록 남는 것은 허탈함 뿐. 실망만 더 커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제정한 새해 첫날에 의미가 없지 않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첫 단어가 입증한다. “태초에” 아니 2022년을 맞이하는 것에도 토를 다는 이들이 허다한데, 웬 고려적 이야기도 아니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느냐고 타박할는지 모르겠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을 읽어보면,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데자뷔를 느낄 것이다. 많이 들었고 보았던 본문이다. 신년 첫날만 되면 펼치던, 올해는 꼭 성경 일독하리라 마음먹고 열었던 그 본문, 바로 창세기 1장 1절이고, 좀 더 넓게 펼치면 창세기 1장 전체다. ‘태초에’로 시작하고, 천지창조를 이야기하는 바로 그 성경 말이다. 그렇다. 사도 요한의 의도는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에 기대고, 끌어와서 자신이 말하는 바를 강화하고 논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의 바로 그분이고, 창조주이기에, 지금도 창조자라고.

두어 해 전부터 나는 한나 아렌트를 틈틈이 읽고 있다. ‘악의 평범성’으로 잘 알려진 이 정치철학자는 곳곳에서 ‘탄생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의 정치 공동체가 이전과는 다른, 즉 나치즘과 전체주의, 아우슈비츠와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지닌 새로운 공동체로 태어나기 위한 그녀의 염원이 담긴 말이다. 끝도 없이 뱅뱅 도는 시간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궁구했다. 그 단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온 것이다. 그렇게 연원을 추적하면 성경에서 나온 개념이 ‘탄생성’이고 명확하게 짚는다면,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의 이 단어, ‘태초에’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바는, 태초, 즉 시작점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인류 역사와 공동체, 그리고 개인에게 가능하다, 현실적이다, 그렇게 말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시작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과 설계도는 예수이다. 그냥 예수라고 하면 안 된다. 특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손가락으로 특정한 대상을 가리켜야 한다. 저것은 아니고 바로 이것이라고 하는 그것을 지시해야 한다. 예수라는 인격 앞에 어떤 단어를 붙이든가, 아니면 ‘=’ 부호를 사용해야 한다. 예수 = ??일까? 그렇다. 예수 = 말씀이다. 말씀인 예수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나요? 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말씀요’라고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을 성서가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을 낭송하는 것, 묵상하는 것, 암송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부여한다. 말씀인 예수를, 말씀 = 예수를 주야로 묵상할 때, 내 삶에, 내 공동체가 재탄생한다. 성경을 읽기로 마음먹고, 묵상하는 바로 그날이 새해 첫날이고, 태초의 그날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태초의 시간이다. 돌고 도는 시간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시간을 선물로 받고자 하는 이에게 단 하나의 선택과 결정은 성경 묵상이다. 아, 태초의 그 날이 오늘이었구나. 잘 읽자! 잘 살자!! (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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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목사] 태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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