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1-2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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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F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6.25전쟁기 보다 구체화된다. 전쟁기 고아들이 급증하자 구호는 절실해 졌고 CCF는 이런 현실에 부응하게 된다. 당시에는 전쟁고아들도 있었지만 버려지는 아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런 참혹한 상황을 알게 된 밀즈 목사는 CCF 클라크총재로부터 일단 5천명d에 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 받았고, 이 약속을 가지고 1950년 9월 한국으로 왔고, 9. 28 서을 수복 때 서울에 입성한 최초의 민간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1년 4월 부산에서 CCF한국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은 아펜젤러(H. P. Appenzeller), 휘치(George A. Fitch), 레인(Harold Lane), 아담스(Edward Adams),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목사, 그리고 오긍선, 이용설 박사였다. 위원장은 사우어(史越, Charles A. Sauer, 1891-1972) 목사였다. 1921년 미국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 그는 영변, 공주 등지에서 일했고 1941년 3월 강제로 한국을 떠났으나 1949년 재내한 하여 교회 복구사업에 헌신했는데, 그의 아들 로버트 사우어(史路德, Robert G. Sauer, 1925-?) 또한 한국 선교사로 일했다. 초대 지부장은 알렌 시틀러(Arlene Sitler), 실행 총무는 노진박(盧鎭璞)) 이었다. 첫 사무실은 호주장로교 선교사이자 CCF한국위원회 위원인 레인의 동구 좌천동의 사택이었는데(1951. 4- 1953. 3), 후에는 동구 초량동 프랑스영사관이 있던 건너편 건물이었다(1953.3-1954.5). 서울 수복 후에는 사무실이 서울 정동 구세군 본영으로 이전하였다.

 CCF 한국위원회는 아동보호시설의 CCF 지원 대상 기관 가입업무를 시작하였고, 부산의 아동보호시설인 새들원, 박애원, 영아보호시설인 애린원, 순천의 인애원, 대구의 대구육아원 등을 CCF후원시설로 받아 들였고 이런 후원 시설은 점차 확대되었다. 부산의 새들원은 안음전 여사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CCF의 특별한 지원을 받았다. 이 무렵 부산에는 순교한 목사들의 유족과 그 자녀들을 돕기 위한 미실회((美實會)가 설립되었는데, 부녀자 복지사업의 효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미실회는 부산 범천동 가야산 아래 미실회 건물이 있었고, 순교자 유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미실회 설립과 운영 또한 CCF의 지원을 받았다. 1953년에는 김응상 나판수 은영기 한정교 홍성유 원장 등 당시 37개 CCF가입시설 원장들을 CCF한국지부와 업무협의를 위한 의도로 기독교아동복리회 한국연합회를 구성하였다. 이런 가운데 피 지원 기관이 확대되어 1955년에는 74개 시설로 증가되었고, 지원받는 아동수는 9,078명에 이르렀다. 1958년에는 77개 시설, 10,696명이 수혜 대상자였다.

 그런데 CCF의 지원시설의 확대, 사무실의 서울 이전 등과 더불어 아동복지 전문학자인 헨리 티즌(Henry Tieszen)의 내한을 계기로 보다 조직화되고 체계화 되었다. 아동들의 생계를 위한 시혜에 머물지 않고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시행하게 되었다. 헨리 티즌은 메노나이트계 인물로서 아동학 관련 전문 학자였고 후일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CCF의 부산에서의 할동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부산 동래 새들원을 특별히 지원했는데, 동래에 토지 10,400평 건물 515.228평 그리고 대청동의 토지 152평, 건물 258.97평을 증여했다. 또 송도의 맹인아동들을 위한 시설인 라이트하우스에 토지 736평, 건물 251.79을 증여했다. 특히 CCF는 부산 송도에 아동병원을 건립했다. CCF는 처음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들의 의식주 문제 해결을 시급한 과제로 여겼으나 아동들의 의료 문제 해결 또한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그래서 1955년 1우얼 부산 서구 초장동 3-43번지에 부산보건원(Pusan Health Home)을 설립하여 아동의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설이 부족하여 1957년 7월에는 서구 아미동 2의 126번지의 건물을 매입하고 보건원을 이전하였으나 시설 부족 현상을 해결하지 못해 다시 서구 암남동 18번지의 대지 약4천 평을 매입하여 1964년 2월 병원 신축을 시작하였고 그해 11월3일 총건평 449평의 현대식건물을 완성했다. 75명의 아동이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었다. 이것이 부산아동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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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기독교아동복리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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