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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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기자시절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근 30년의 한국교계 풍속도는 황폐한 광야생활이었다. 대형교회는 전무하고 1000명가량 모이는 교회면 큰 교회였고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받았던 시대였다. 그 당시 교계기자생활이란 하루살이로 살아가는 춥고 배고프고 고달픈 생활이었다. 지금의 기독교신문 전신인 교회연합신보에서 있었던 일을 한 토막 소개하면 故 강수악 사장과 편집국장인 장충협 장로는 회사 수금은 안 되고 구독료 가지곤 회사 운영도 못 할 지경이었는데 돈이 될 만한 광고를 게재하게 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장과 편집국장이 동시에 광고주에게 들이닥친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연출됐었다. 
급료가 있으면 다행인 교계신문사의 형편이었다. 당시 기자들은 감사의 뜻으로 촌지 몇 푼 받으며 살아갔다. 기자들은 한결같이 가정을 제대로 이끌어 나가기 힘들어 부인들이 나가서 직장생활 하던지, 나처럼 처가생활로 붙어살면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살았었다. 쌀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한다는 말이 있지만 도저히 제대로 돈을 가져가는 날이 없었으니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첫째와 둘째 아이를 출산 할 때도 외상이 아니라 무료 병원 신세를 졌던 기억이 난다.  누구 한 사람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인사가 없었다.
하지만 기자정신 만큼만은 투철했다. 1976년 여름철이 지나가는 8월 하순경이었다. 부산에서 최초로 민간 아파트건설에 부산시 자금으로 저리로 빌려주는 제도가 막 통과됐을 때였다. 당시 한국 재계에서 반도목재 강석진 사장과 겨누는 상대가 바로 성창기업목재주식회사 정태성 장로였다. 그는 초량교회 시무장로였고 부산YMCA이사장으로 재직했다. 그가 Y이사장으로 재직할 때에 시공업자를 같은 경북 봉화 동향인에게 믿고 맡겼다. 아파트공사를 하기 위해 인근 Y땅을 매입하면서 그곳에 신우아파트를 짓게 됐다. 그런데 자금으로 부산시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는데 필요 서류를 마치 Y가 시공하는 양 Y직인을 이사회결정도 없이 사용해서 막대한 융자를 받아 냈다. 또 Y기금을 자신의 사돈 백흥섬유에 빌려줘 부도를 맞아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뒷날 변재함)
그리고 통일교 성지순례 미끼에 놀아 난 부산 교계 중진 합동 측 목회자들이 중도에 이 사실을 알고 하와이 중간지점에서 돌아온 ‘성직자의 함정’ 등 가차 없이 보도한 용기 있는 기자 정신만큼은 가난해도 살아 있었다.

△교회 권력(교권)
80년대 초 부산교계의 교회권력층이라면 부산시 시경 경목이었다. 그 당시 경목실장은 지프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막강한 교회와 사회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경목증명서 한 장이면 사소한 교통위반에는 무사 통과였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놈의 ‘경목증’ 하나 얻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고, 경목 하는 것에 목을 멜 정도로 각광을 받았다. 유신시대 교계도 유신지지 경목들이 줄을 서고 지지성명을 낼 정도였다. 여름철 경목 세미나가 있던 해운대 미진장호텔을 취재 갔던 기억이 난다. 취재를 마친 쉬는 시간에 시경 경목실장인 故 채종묵 목사가 같은 동료 목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던 일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저 신 기자 식사 먹여 보내세요.” 교회권력에 사무쳐, 부산남교회를 다녔던 필자가 기장 측 중부교회로 옮겼을까? 보수에서 진보진영의 에큐메니칼로 신앙을 옮겼다.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뒤에서 조용히 돕고 살았던 중부교회 10년 생활. 그때 김광일 변호사를 알았고, 최성묵 목사를 힘닿는 대로 도왔고 Y운동과 와이즈멘 운동의 멤버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통합 측 교단으로 돌아왔지만 육사27기를 수석 졸업한 잘 나가던 군인 동생 때문에 보안사 요원으로부터 중부교회에서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동생의 대령진급을 위해 교회를 옮긴 것이 계기가 되어 바로 은성교회 故 최상식 목사의 참신한 목회자상을 보았다. 길·흉사 때마다 이웃을 위해 방문하는 최 목사가 은퇴하고 떠나는 김해공항엔 이웃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몰려 온 것을 보고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존경받는 것을 알았다. 은퇴 후 서울에서 독립 교회 설교 목사로 있다가 서울대 출신 아들에게 맡기고 하늘나라로 갔다.

△지방화 시대 신문 창간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지방화 시대를 열고 풀뿌리 민주주의가 꽃 피던 1995년 4월 부산기독교신문을 창간했다. 제호를 한국기독신문으로 바꿔 재도약할 수 있도록 교계와 여러 믿음의 인사들을 통하여 20년을 줄곧 달려올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요, 갚을 수 없는 은혜이다. 이제 서산에 황혼에 지는 노을과 같이 뉘엿뉘엿 세월이 71km로 달려가고 있다. 지금도 한국교계는 새로운 교권이 판을 치고 문제를 야기하고 세상이 걱정을 하는 세속적인 형편에 접어들고 있다. 하비콕스의 세속도시와 같이 세속 대형교회가 말썽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는 준엄한 채찍으로 새로운 제2의 부흥을 위한 도약이고 진통으로 간주하라는 경고 메시지다.
지난 45년은 나에겐 한없는 광야의 생활에서 온갖 비바람과 땡볕을 이겨내 한 송이 ‘인동초’에 불과했다. 언제까지 대기자 생활을 지탱 할런지는 오로지 한분이신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 따라서 나는 지난 45년 동안 지은 죄들과 잘못을 후회하면서 용서를 새벽재단에서 빌고 또 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로 소풍 삼아 데리고 가는 날이면  미운 정 고운 정 무딘 필봉도 끝날 날이 오겠지 라고 오늘도 어제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름휴가를 얻어 경주 대명콘도에서  나의 달려 온 45년을 뒤돌아보는 한여름 밤에 이 글을 쓴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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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기자생활 45년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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