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2-0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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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토론토대학교에서 열린 캐나다장로교의 공식적인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했다. 한국 파송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함께 한 은혜로운 예배였다. 예배 말미에 모두 함께 일어나 부른 찬송이 인상적이었다.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이란 찬송이었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캐나다장로교회의 첫 순교 선교사 윌리엄 매켄지(William J. Mckenzie, 1861~1895)가 가장 좋아했던 찬송이었다는 사실을 후일 알게 되었다.

 매켄지 선교사는 우리나라 첫 자생적 신앙공동체인 소래교회의 초대목사였으며, 조선에 온지 1년 반 만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매켄지의 순교는, 선교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1898년 캐나다장로교회는 5인의 첫 공식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해, 함경도 원산, 함흥, 성진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한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조선에만 머물지 않고, 흩어지는 조선인들을 시베리아, 만주, 일본까지 따라가 헌신적인 선교사역을 펼쳤다.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 인근에 묻혔지만, 지금은 무덤의 흔적조차 알 수 없는 윌리엄 매켄지 선교사는 캐나다교회의 조선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었다.

 2003년 부산장신대학교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던 중, 「소명」이란 제하의 오래된 교지(校誌)에서 호주선교사 서두화(Alan Stuart, 1926생 95세)란 이름을 발견한 것이 호주교회의 부산경남지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부산장신대학교 교장이었던 서두화 선교사님과의 만남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후학들을 위한 책도 보내주시고, 학생들을 위한 따뜻한 격려도 아끼지 않으신다. 서 선교사님과 부산장신대의 이야기는 호주교회의 첫 순교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J. Henry Davies, 1856~1890)로부터 시작한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지역 선교를 위해 도보로 여행하던 중 얻은 질병으로 인해, 조선에 도착한지 6개월 만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데이비스의 순교는, 선교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891년 호주교회는 5인의 첫 공식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해, 경상남도 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감당해 나아갔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현재 부산 중구 동광동 복병산 중턱에 묻혔고, 6.25전쟁 등으로 인한 변화 속에서 무덤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호주교회의 부산경남지역 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캐나다와 호주 선교회는 선교정책과 사역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중심인 평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동북단 함경도와 동남단 경상남도 지역을 맡아 선교했다. 캐나다선교회는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자행되었던 함경도의 신앙인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호주선교회는 일제 침략의 관문이 되어버린 불교의 땅 경상남도에서 복음, 의료, 교육 선교에 헌신했다. 미국 장감선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형편의 캐나다와 호주 선교회였지만, 선교사들의 순전함과 헌신은 신실한 신앙인의 표상으로 오늘날까지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한국교회사 관련 강의를 할 때마다, 매켄지와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신학생들에게 들려준다. 특히 신학대학원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는, 매켄지와 데이비스 같은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부탁한다. 참된 스승보다 반면교사가 더 많다고 느껴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매켄지와 데이비스 선교사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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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매켄지와 데이비스 선교사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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