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해 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괜찮다고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눈 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어지러운 상황이 펼쳐져 있으면, 뒤돌아서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해결을 위한 빠른 열쇠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솔직해 질 수 밖에 없는 경우에도 회피하고, 숨고, 외면하며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나와 종종 마주한다. 특히, 아이와 관련된 일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엄마, 은율이 선생님을 만났는데 나보고 은율이 받아쓰기와 구구단을 가르치래”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기 전, 둘째가 학교에서 오더니 나에게 다급한 일을 전하듯 헐레벌떡 거리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둘째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다급할 수 있는 일이다. 본인은 6-7살 때 한글을 다 알아서 1, 2학년 받아쓰기 할 때는 내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했고, 구구단도 설렁설렁 외우면서 끝냈는데 동생은 2학년 1학기가 끝나가도록 학습적인 부분이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으니 충분히 놀랄 만하다.
“엄마가 은율이 봐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네. 알았어. 엄마가 신경쓸테니까 걱정하지마”
그래, 이쯤이면 슬슬 펑크가 날 만도 하다. 셋째 은율이는 온갖 핑계를 대며 학교 공부 봐주는 것을 미뤄왔다.
“12월 생이기에 조금 늦어도 괜찮다. 위에 형과 누나가 있는데 알아서 어깨 너머로 배우겠지. 또릿또릿해서 자기 알아서 다 할거야”
이런 말들이 주 핑계였다. 그 어느 말에도 “엄마인 내가 너무 여유가 없어서 못 봐주고 있다”나, “셋째까지는 도저히 신경쓸 수가 없었다” 등 나 때문, 나 책임이란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순간, 즉 상황을 솔직하게 인식하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그러면 뭔가 총체적으로 복잡해질 것이란 생각에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 4명을 양육하고 일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듣는 말 중 가장 자주 듣는 표현은 “아이 4명을 키우고 일도 하고 정말 대단해요”이다. 이런 말들을 들으면 사실 “아니에요. 아이들 양육도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곳곳에서 펑크가 나는데 그냥 모른 척하고 살고 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데, 그냥 씩 웃으며 못 들은 척 하고 만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동 전문가들이 아이가 1세부터 3세까지는 가능하면 주 양육자가 엄마가 되어서 안정적으로 양육하는 것이 아이의 평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단.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그렇게 키우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처해진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은 잘하고 싶은데 많은 한계에 부딪혀 곳곳에서 구멍이 펑펑 터진다. 당연한 것이지만, 내가 아이들의 학업에 신경을 쓰고 집에서도 봐주면 별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럴 여유조차 생기지 않아 몇 개월 동안 놔두면 ‘알아서 잘 하겠지’라는 내 희망은 뿌연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뜻하지 않는 문제들만 가득 있는 것을 본다.
그러면, 또 난 상황에 솔직해지지 않고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나 때문임’을 피하고 싶지만, 결국 문제의 해결은 ‘나 때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지금 나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지금 내게 주어진 여러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분명 얻는 것이 있고, 잃는 것이 있을 것인데, 생각할 여유조차 없을 때는 하루하루 살아내기만 하다 만다. 하지만 내가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고 적절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때 비교적 모든 일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감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주어진 일에 적절한 우선 순위를 정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도 이 질문을 대뇌이며 분주한 삶의 퍼즐을 맞춰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