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3(목)
 

오랜만에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을 만났더니 이런 말을 합니다. 전목사님, 전에 그 교회는 어떻게 됐어요? 아, 그 교회요? 25억으로 끝났어요. 와, 25억이나요? 그렇게 많이요? 그 교회는 돈이 많나 봅니다. 아뇨, 아직 교회 빚이 몇십억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많이 줘요? 그러면서 하~참을 연발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또 열나려고 하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25억! 거금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평생 구경도 하지 못하는 돈입니다. 그 많은 돈을 수백명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서 지불했습니다. 열두번 세번 사건은 이렇게 25억으로 끝났습니다. 저는 열두번 세번에 이십오억을 붙여서 일이삼이오(12325) 사건이라고 명명하면서 이 글을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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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호 목사(광주은광교회)

 

원만한 합의?

 

이 사건의 처리는 노회에서 해결했어야 맞습니다. 하지만 노회는 이 간단한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총회재판국으로 넘깁니다. 총회재판국은 최선을 다해 재판을 했습니다. 결론도 났고 여러 압박들에 대한 입장표명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 권력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화해조정위원회라는 걸 만들어서 처리를 하고 요식행위로 재판도 시켰습니다. 강력한 권력이 작용했습니다. 복마전 같은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관련된 목사님들이 교단의 지도자들이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들도 여럿 계시기에 글쓰기도 싫었습니다. 다만 이 문제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아서 솔직히 말해서 제 마음 편하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언론보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원만한 합의를 보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속까지 까발려서 뭐하겠습니까? 원만하다고 해야겠죠. 그런데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그게 진짜 원만한 건가 하는 질문이 제 머리를 무겁게 만듭니다. 정말이지 누가 누구와 원만한 합의를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로 제게 말을 걸어오신 백퍼센트의 모든(!) 목사님들은 울분을 터뜨리던데요? 참빛교회 장로님도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던데요? 참빛교회 성도님들 마음은 잘 모르겠습니다. 원만한 합의로 느끼셨는지요? 아니면 지긋지긋하니까 달라는 대로 줘버리고 그만하자는 심정이신지요? 독일말에 Ende gut Alles gu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원만한 합의라면 끝이 좋다는 거겠죠. 그런데 끝이 좋질 못합니다. 무언가 계속 질질거리면서 나오고 있습니다. 뭐 하나 개운한 게 없습니다. 정말 마음에 안 듭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불법적인 행태 추적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전현직 총회장을 비롯해서 교단의 중견 목사들이 대거 동원된 이 큰 사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 버리는 건 잘못이라고 봅니다. 이 사건의 의미라도 정리하고 싶습니다. 좋은 게 있으면 권장해서 다음에 이런 일 생기면 모범사례로 삼아-원만한 합의가 되었다고 하시니- 빨리 빨리 합의하고 해결하고, 잘못된 건 경고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부탁드리는 것은, 제가 잘못 쓴 부분에 대해서는 알려주십시오. 정중히 사과하도록 하겠습니다. 참, 전에 썼던 글에서 다른 교단 친구에게 사과하겠다고 했는데, 저 사과했습니다. 다소 생뚱맞고 약간 농담 섞이기는 했지만 사과는 분명히 했습니다.

 

이 건의 출발점인 열두번 세 번에 대해서는 입 아파서 더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일을 마치 심각한 잘못이 아닌 것처럼 접근하는 목사가 있다면 저는 제 양심을 걸고 감히 “타락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의 얼굴도 마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왜 그렇게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지 그 사상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게는 두 가지가 보입니다.

  

정치지상주의

 

첫째, 정치지상주의입니다. 정치로 모든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정치만능주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문제는 정치의 방향입니다. 교회 정치는 교회의 거룩과 화합을 목표로 합니다. 두 가지가 충돌하면 당연히 거룩이 먼저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교회는 본질을 상실한 교회니까요. 그래서 교회는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손해도 보고 고통도 당하는 겁니다.

 

세상 정치는 거룩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번 일이삼이오 사건도 거룩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세상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사법파동이 아니라 행정 파동입니다. 행정 절차를 빙자해서 정치 권력으로 사법권을 억눌러 버렸습니다. 정치 능력을 통해서 사법을 무력화시키고 시녀화해버렸습니다. 군사독재 시대 방식이 통한 겁니다. 그래서 겉은 봉합이 된 듯하지만 속은 곪은 채로입니다. 본질 문제를 외면하고 자기편이 원하는 쪽만 향하는 걸 보면서 고신에 대한 마음이 차가워진 목사들이 제법 많다는 건 알아두어야 할 겁니다.

 

좋은 교회 정치는 모든 목사의 책임입니다. 좋은 정치를 위해서 목사들은 지금까지 어느 쪽이 옳은가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어느 편이 더 성경적인가, 어느 편이 총회 헌법에 맞는가, 어느 편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어느 쪽이 목사에게 이익인가? 어느 쪽이 우리 진영에 득이 되는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던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도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정치를 해도 전체 노선이나 방향은 총회의 유익, 교회의 유익, 고신 정신의 유지 등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정 사항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릅니다. 외적으로는 원만한 합의를 했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의 결정을 내렸다, 교회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들 말합니다. 네, 맞습니다. 겉만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관계된 목사님들 한 분 한 분은 괴롭고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전현직 총회장들의 집요한 분투 노력이 없었다면 그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졌을까요? 그분들의 정치가 없었다면 목사 살리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저는 여기서 정말 본질적인 질문을 또 던져봅니다. 그렇게 목사 살리는 것이 정말 목사 살리는 겁니까? 정말 그게 목사를 살리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믿으면 큰일납니다. 목사가 그런 행동을 해도 적합한 벌을 주지 않는 것은 그 목사를 죽이는 겁니다. 그건 잘못을 범한 목사에게서 회개할 기회를 뺏어버리는 겁니다. 그는 더이상 당당한 목사일 수 없습니다. 당당한 척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열두번 세 번의 정당성을 변명해야 하고, 다른 목사들에게도 그런 행동은 괜찮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게 어디 할 짓입니까? 차리리 중벌이라도 달게 받고 회개하고 회복해서 속시원하게 새출발하는 게 목사 살리는 길 아닙니까?

 

제가 만나본 분들은 그 누구도 일이삼이오 사건의 해결 과정을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 부글부글 끓고 있을까요? 정치의 방향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아니 변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흔히 말하는 내 편이 곧 정의요 진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막무가내로 밀어부쳐서 만든 결론을 “원만한 합의”라고 말하는 것은 “원만”이라는 단어의 뜻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제가 만난 모든분들은 이걸 원만한 합의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정치지상주의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방향이 내 편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세속 정치판을 닮았는지요! 아니 세속 정치판이 갈망하는 구도인지요! 그런 식의 정치는 이번 사건이 마지막이기 바랍니다. 지도자들이 정치 만능사상을 가지면 안 됩니다. 거룩이냐 타락이냐 하는 문제를 정치로 풀려고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편이 정의요 진리라는 착각도 버려야 합니다. (저도 착각을 할 수 있을 테니 어떤 착각을 한건지 제발 충고 좀 해주십시오.) 여론몰이나 진영논리에 묶인 정치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며 그것은 목사가 거룩할 때 가능하다는 상식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번에 고신정신을 뭉개버린 지도자들은 정치의 변질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설교기능지상주의

 

둘째, 설교기능지상주의입니다. 정치의 변질은 사상의 변질에서 옵니다. 이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전직 총회장 J 목사님은 “설교를 들어보았느냐”고 제게 반문했고, 저는 그런 목사의 설교는 듣지 않아야 된다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J 목사님은 다른 이들에게도 박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라고 말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박목사를 너무 아껴서 한마디한 것이라면 그냥 넘어가도 됩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줄기차게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총회의 지도자들이 그 말에 승복하고 따라갔다면 그분의 사상이 총회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새로운 사상이 고신 총회에 스며들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하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 사상을 저는 “설교기능지상주의”라고 명명하겠습니다. 당연히 목사는 설교를 잘해야 합니다. 잘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 기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삶이요 인격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배워온 신학이요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들어보라”는 말로써 보여준 설교기능지상주의는 설교만 잘하면 열두번 세 번 정도의 행위는 덮을 수 있고, 25억 정도를 줘서 분립개척도 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설교지상주의가 거룩한 삶과 인격을 추구하는 설교자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신의 새 기준처럼 만들었습니다. 기준은 생각과 사상과 신념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섬뜩한 느낌도 듭니다.

 

그런 사상에 의하면 목사의 삶보다 중요한 것은 목사의 설교 기능입니다. 목사는 거룩보다는 설교 기능에서 탁월해야 합니다. 행동의 덕스러움은 설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설교와 삶이 일치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린다고 배웠습니다. 사실 그런 건 일반인들도 다 아는 상식입니다. 일이삼이오 사건을 통해서 많은 지도자들이 그런 상식을 깡그리 무시하고, 설교 기능만 뛰어나면 된다는 신기원적인 사상과 신념을 관철시켜버렸습니다.

 

갑자기 또 타교단의 예가 생각납니다. 어느 교단에 설교 잘하고, 젊은이들이 열광하던 목사가 있었습니다. 만 명 이상 모이던 대형교회를 담임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책도 여러 권 나왔습니다. 하지만 부덕한 문제로 그는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 치리과정은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혔더랬습니다. 거기 대해서 뜻있는 많은 목사들의 항의와 비판이 뒤따랐습니다. 그래도 그 교단의 누구도 나서서 “그의 설교를 들어보라”고 변호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 교단보다 더 나쁜 쪽으로 앞서버렸습니다.

 

로이드존즈의 저 유명한 책 “설교와 설교자”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즉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명의 진수 부분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우리 자신을 점검해보는 방편으로서 중요합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경건한 자라야 합니다.” 설교자는 경건해야 하며, 사람들의 타락에 대해 뼈아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서 소명이 시작되며 제대로 된 설교가 나온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됩니다. 로이드존즈를 전공하고 이 책을 번역하신 분은 이 내용을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겠죠. 하지만 지금 그분의 사상은 로이드존즈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알프레드 집스도 그의 책 “설교자와 그의 설교”에서 모순된 삶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조화되지 않는 삶의 가장 큰 위험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이름에 불명예를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들의 말과 일치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설교자 그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그가 무엇을 하느냐 보다는 어떤 사람이냐를 더 크게 고려하신다.” 설교학자들은 그 누구도 설교기능지상주의를 주장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역사에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역사에는 상징적인 사건들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역사에는 긍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 문에 95개조 항목을 내건 행동 같은 것 말입니다. 부정적 역사에는 부정적 사건이 있습니다. 을사오적의 등장 같은 것 말입니다. 이번 일이삼이오 사건도 우리 교단 역사에서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대법원 판결을 하면서 소수의견이라는 걸 남깁니다. 이번 총회재판국 판결이 만장일치가 아니었다면 소수의견이라는 걸 남겨놓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소수의 바른 분들에 대해 존경이라도 표할 수 있게 말입니다. 불법에 항의한 재판국원들이 있어서 우리 교단에도 “공정과 상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건 참 큰 위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랬으면 훗날 고신 역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 한일합방 당시에는 을사오적이 권세를 발휘한다 해도 훗날에는 만주벌판을 달리던 소수의 독립투사들이 민족의 자부심이 되는 것처럼 그런 분들이 우리에게 자부심도 안겨줄 텐데 말입니다.

 

지난번에 쓴 글 “고신 드디어 기준을 세우다”에서 쓸까 말까 망설였던 문구가 있습니다.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실었던 글입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을 목놓아 우노라!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우리 2000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백년도 훨씬 넘은 글이지만 그분의 통곡이 제 마음에 울립니다. 조금 바꿔서 그분처럼 소리치고 싶습니다.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세속의 노예가 된 고신이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고신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목사여, 목사여. 이날을 목놓아 우노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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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일이삼이오 사건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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