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23(목)
 

서임중 목사.jpg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슬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슬은 지표면(地表面) 가까이의 풀이나 물체에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되어 생긴 물방울인 것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즉 야간의 복사냉각(輻射冷却, radiational cooling)에 의하여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이슬은 비록 그 양이 많지는 않지만 식물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특히 사막지역 등지에서는 식물의 생육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이슬(Dew, 露)이 사용될 때도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축복의 의미로 조용히 내린 이슬이 갈한 식물을 적셔 초목에 생명을 줌과 같다. 둘째는 덧없는 표상으로서의 이슬로 해가 돋으면 금새 증발하여 사라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바알과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이슬과 같으리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이슬이 되신다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과 같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는 살리는 생명이 된다.

 초목이 자라는 데는 물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른 광야에서 이슬은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팔레스틴 지방의 식물과 초목에 있어 이슬은 그야말로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슬은 낮에 내리지 않고 밤에 내린다.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리 인생도 밤 같은 어두운 때가 있다. 역경과 환난, 고난과 아픔, 슬픔과 실패를 만나는 때가 그것이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은 때에 임하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역경의 때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불행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시냇물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그 물 아래 미처 보지 못한 수많은 크고 작은 돌들이 있기 때문이다. 돌이 없는 골짜기를 흘러가는 시냇물은 소리가 없다. 안개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었다고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다시 온 대지에 빛을 뿌린다. 제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모든 제비가 죽은 것이 아니다. 겨울이 가면 제비는 봄과 함께 다시 돌아온다. 추운 겨울이라고 앙상한 모든 나무들이 죽은 것이 아니다. 봄 돌아오면 앙상한 가지마다 새순이 돋고 새 생명이 약동한다.

 세상살이가 날마다 좋기만 하겠는가? 아니다. 곤고한 날, 실패의 날, 외로운 날, 아픈 날, 고통의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우리 인생의 밤이다. 이 밤 같은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처럼 내린다. 캄캄한 밤일수록 빛이 더욱 찬란하듯 우리 인생도 캄캄한 밤일 때에 하나님의 광명한 진리의 빛이 더욱 보인다. 내 영혼이 어두울 때 은혜의 빛이 보인다. 내 삶이 지쳐 어두운 밤 같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리는 것이다.

 안동에서 목회를 할 때 대학교수로서 한국 농학(農學)의 권위자인 조 박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 이 일은 어두운 밤과 같은 상황이었다. 대학 강단에도 설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앞이 보이지 않고 살 소망이 끊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절망의 때에 조 박사가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의 아내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오직 믿음으로 남편을 내조했다. 예배 시간이면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축도를 마치고 내려가면 나는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감싸고 오른손으로 머리에 안수를 했다. 은혜의 이슬이 메마른 그의 영혼을 적셨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메마른 광야 같은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슬처럼 임하며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걷고 말하며 다시 강단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회복되면서 잃었던 영적 생명을 다시 찾았다. 칠흑 같던 잠깐의 어두움은 새 빛에 물러갔고 그들은 안수집사님으로 권사님으로 아름답게 교회를 섬기며 교수로서 존경받는 사명도 잘 감당하셨다.

 필요악이란 말이 있다. 파괴는 건설의 어머니란 말도 있다. 파스칼의 병약함은 모든 사람의 심혼을 정화시키는 ‘팡세’를 세상에 내놓게 했다. 십여 년을 결핵성 골수염으로 투병한 미우라 아야꼬의 고통은 인간의 본질을 깊이 파헤친 ‘빙점’의 명작을 쓰게 했을 뿐 아니라 병상에서 영생할 수 있는 신앙을 얻게 했다. 부서진 질그릇 같은 훼니 제인 크로스비, 남의 실수로 눈이 멀어 평생 시각장애인이 된 그 가냘픈 여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맞으면서 수많은 찬송시를 썼다. 질고의 대명사 송명희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다. 육신이 병들고 눈물을 음료로 대신하던 고난의 때를 지나며 살 소망마저 끊어졌던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내렸다. 우상을 섬기는 가정의 아들인 내가 목사가 되었다. 목양길 걸으며 한 걸음도 더는 앞으로 내딛지 못할 것 같은 그 밤 같은 때에도 하나님은 이슬 같은 은혜를 내려주셨다. 그 속에서 나는 용서를 배웠고, 감사를 배웠고, 사랑과 소망을 배웠으며, 기도와 겸손을 배웠다.

 그렇다. 우리의 삶이 상처투성이로 소망이 없을지라도,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메마른 땅일지라도, 비록 육신은 깨어진 옹기 같을지라도, 삶의 자리가 칠흑 같은 밤일지라도, 이슬처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날마다 축복을 노래할 수 있다. 인생들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고난의 날들은 어두운 밤과 같지만 그 밤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두운 그 밤에도 이슬은 내린다. 그러나 이슬이 내리지 않는 밤이 있다. 구름이 낀 날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구름이 끼여 있으면 은혜의 이슬은 내리지 않는다.

 이슬은 밤에 내린다. 구름이 없는 맑은 밤에 이슬이 내린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서임중 칼럼]이슬은 밤에 내린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