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7-3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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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구마를 싫어한다. 어릴 때, 부모님이 흰 쌀밥 대신에 고구마를 자주 주어서 평생 먹을 고구마를 그 때 다 먹은 것 같아 지금은 고구마 줄기, 고구마 잎 등 고구마와 관련된 음식은 즐겨 먹지 않는다.

시골에 살았던 우리는 뭐든지 부족했다. 쌀밥은 물론이고 지금은 어린 아이들이 흔하게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 하나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넘쳐난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먹는 이야기’와 ‘많이 먹음으로 인해 살빼는 이야기’ 뿐인 것 같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정보가 넘쳐나고, 유튜브를 통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설교를 맞춤식으로 들을 수도 있다.

물질뿐만 아니라 의지도 넘쳐나는 시대이다. “할 수 있다”는 무한 긍정의 붐이 일어나면서 “할 수 없다”는 말은 마치 ‘실패한 사람’ ‘능력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며 내재성의 넘침으로 자기 중심성이 극에 달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할 수 없어”가 아니라 “할 수 있어”라는 긍정 과잉으로 발생되는 문제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우울이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를 통해 “긍정의 과잉은 우울을 부른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과 해서는 안되는 것을 전부 할 수 있음으로 바꾸는데 오는 증상 중 하나가 우울증”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는 결핍의 시대를 빠른 속도로 지나 과잉 사회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지금 과잉 사회의 부작용들이 무한 경쟁, 우울과 같은 현상들로 드러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무한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또한, “할 수 있다”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척척 해내는 초인이 아니다. 한계를 가진 존재에게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듯 몰아붙이면 결국 남는 것은 탈진과 절망뿐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과잉 능력, 과잉 긍정 등으로 흘러가면 인간에게 부여된 존엄성마저 흔들리게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계가 있는 피조물로 지음 받은 우리가 과잉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먼저, 나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체면을 걸 듯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해낼 수 있어”라는 무한 긍정을 자극하면 결국 제 풀에 지치고 말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는 달리, 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짜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타인 역시 나와 같이 한계를 가진 사람임을 인정할 때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사람을 존중하게 된다. 그럴 때 “저 사람도 혼자 다 할 수 없으니 나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라는 긍휼한 마음이 생기고, 함께 할 수 있는 따뜻함이 전해진다.

얼마 전 코로나19로 모두 힘든 이 시기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치킨집 사장님 이야기다.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형제에게 무료로 치킨을 준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시민들이 나서서 일부러 그 치킨집에 주문했다는 소식. 그래서 그 치킨집 사장님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경쟁과 과잉 사회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 이야기다.

 

지금 이 시점에서 몇 해 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생각이 난다. 모두가 살리지 못한다고 말할 때,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김사부는 “내 구역에서는 하나밖에 없어. 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고 말했다.

피로사회, 우울사회, 절망사회, 위협사회라고 부르는 지금, 우리에게 시골의사 김사부의 따뜻함과 정체성이 필요하다.

이 마음과 이 정신으로 가장 귀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양식을 붙들고 살아갈 때 과잉 사회를 넘어 따뜻함이 살아있는 사회,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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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과잉 사회에서 따뜻한 사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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