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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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역사의식을 본받자고 하지만, 그들이 과거에도 항상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은 이미 1914년에 발발된 1차 세계대전의 주범이기도 했다.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한 사건이 이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였지만, 유럽은 이미 제국주의간의 세력다툼으로 갈등이 첨예화되어 있었고, 특별히 독일의 빌헬름 2세의 무모한 팽창정책이 전쟁의 근본원인이었다. 그리고 전쟁을 앞두고 독일의 당대 유명한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포함한 93인의 지성인 그룹은 황제의 전쟁정책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이 전쟁은 결국 3,6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뒤,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이미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쫓아낸 독일은 종전을 위해 모인 베르사이유조약에 서명했다.

독일은 많은 영토를 잃고 전쟁배상금을 물게 되었으나, 연합군이 자국영토까지 쳐들어오기 전에 항복하므로 인해 국가 인프라가 유지되는 등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완전히 망하지 않은 독일은 이 참혹한 결과를 이룬 전쟁의 원인자로서 참회할 줄을 몰랐고 역사를 정직하게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국력이 점차 회복되자, 전승국 영국과 프랑스가 가하는 억압과 고립정책에 반감을 갖게 되고 또한 과도한 전쟁 배상금에 대한 불만도 커졌다.

아울러 권위주의적인 구시대에 익숙했던 보수적인 사람들은 전승국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바이마르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전승국들에 의해 독일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과거 독일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다시금 강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앞장 선 것은 개신교회였다. 특히 과거 황제의 권위적인 통치에 안주하면서 교권주의에 익숙해 있었던 교회 지도자들은, 전쟁 후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고 자유주의라는 명분하에 이런 체제가 흔들리는 것에 불안하면서 민주정권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독일의 민족주의가 루터주의와 맞물리면서 교회는 쉽게 민족주의에 함몰되어갔다. 1917년 종교개혁 400주년을 계기로 루터주의 신학자 ‘칼 홀’(Karl Holl)로부터 발화된 루터 르네상스는, 점차로 ‘루터와 정치’, ‘루터와 술’, ‘루터와 가정, 연애, 여인, 교육’ 등 사회 각 방면을 루터와 연결시키면서 루터에 열광하게 했다. R. 오이켄이 ‘루터와 우리’ 라는 책에서 루터를 ‘참된 독일인의 형상이자 심볼’로 규정했듯이, 루터는 순전한 신앙의 교부이전에 가장 자랑스러운 독일의 영웅으로 간주되면서 민족주의의 중심에 놓여졌다.

이런 민족주의 열풍은 극우정당인 나치에게 길을 열어주어 마침내 1933년 집권당이 되게 했고,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이 참혹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서 이미 민족주의와 극우정치로 정치화된 개신교회는 누구보다도 히틀러를 열렬히 환영하면서 가장 커다란 전쟁의 공범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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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야기]독일의 역사의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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