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1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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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열(權世烈)이라는 한국이름을 널리 알려진 프란시드 킨슬러(Francis Kinsler, 1904-1992)는 1904년 1월 13일 필라델피아의 저먼 타운(Germantown)에서 아더(Arthur) 킨슬러와 베르타(Bertha)의 아들로 출생했다. 위로 두 누이와 형이 있었다. 형은 후일 목사가 되었고, 두 누이는 한국 선교사로 살았다. 권세열은 1925년 매리빌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하여 3년 간 수학하고 1928년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4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평양지부에 배속된 그는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1936년까지 성경과 영문학을 가르쳤다. 1930년 9월 18일에는 도로시(Dorothy Woodruff, 1907-2001)와 결혼했는데, 그는 권도희라고 불렸다. 이들은 오래 전 약혼한 사이였는데, 9월 12일 내한하였고 일주일 후 숭실학교 근처의 매쿤 선교사의 집 뜰에서 야외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이들은 성경구락부를 조직하고 거리의 방황하는 이들에게 성경과 한글을 가르치는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의 교육운동을 시작하여 큰 지지를 받았으나 1940년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해방 후 1948년 다시 내한하여 대구등지에서 활동하며 성경구락부를 조직하여 문맹퇴치 한글 보급 성경 교수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고,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신약을 가르쳤고, 1952년에는 교장 대리로 일하기도 했다. 1951년과 1957년에는 주한 북장로교선교부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고, 한국의 존경받는 선교사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여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43년간 일하고 1970년 9월 14일 정년으로 한국을 떠났고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92년 1월 9일 캘리포니아 주 듀알테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주요한 사역은 한국 전쟁기 군목 제도 창설과 피난민 구호, 그리고 포로수용소 전도였다. 그는 전쟁기 피난을 가지 않고 부산에 체류했는데, 1950년 10월 5일자 선교보고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말자 나는 부산과 그 인근에서 구호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우리 선교부의 다른 분들은 대구를 중심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 중에막대한 양의 세계교회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구호품(약 2천 포대의 밀, 콩, 팥, 수백 통의 의류들, 1천톤이 넘은 기름, 50부대의 솜, 90드럼 이상의 분유, 약간의 비누, 신발, 실)을 서울로 가져가지 않고 부산의 창고에 보관중이었다. 그리고 우리 서울 선교부의 운전 기사 한 분이 선교부의 큰 트럭 한 대를 부산으로 가져왔다. 나 역시 좋은 지프차 한 대를 감리교 선교부로 부터 빌려 쓰게 되었다. 구호사역에 경험이 있는 후렛쳐(Fletcher) 박사와 그의 동역자들이 부산에 왔으므로 우리는 함께 구호사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권세열 선교사는 부산의 한 큰 교회에 구호본부를 설치하고, 1950년 7월부터 3개월 동안 곤핍한 이들에게 구호하고 그들을 도왔다. 그래서 6만 명의 피난민들을 구호했다.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선교부가 보관하던 솜을 가지고 1천개의 이불을 만들어 아기를 가진 이불 없는 가정에 분배했다. 구호품을 트럭에 싣고 시골교회로 순회하며 구호품을 분배하기도 했다. 이상이 1950년 10월 5일에 쓴 보고서의 내용이다.

 1950년 11월 1일자로 서울에서 쓴 선교 보고에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국에 남기고 간 공산군들의 잔악상은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나는 폐허가 된 도시들과 잿더미로 변한 가옥들, 파손되어 버려진 승용차, 지프차, 트럭들, 그리고 왜관, 김천, 대전, 서울, 사리원, 그리고 평양에 버려진 탱크들을 보았다. 그런데 공산군들이 가져온 최악의 파괴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한국인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당한 재난과 위협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한밤중에 불려나가서는 영영 무소식이 된 그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공산군들은 총을 가지고 들어와서 식량과 의류를 탈최한 뒤 개별적으로 불러내어 처형하였다. 안심하고 지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보이면 모두 처형되었다.” 그런가 하면, 평양에서는 20여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행방불명이 되었고, 사라진 사람까지 다 합하면 2만 명이 더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철의 장막 뒤를 보았고, 그 참상에 나는 전율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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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3, 권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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