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1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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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칼럼을 쓴지가 26년이 됐다. 본보는 26년 전 1995년에 창간했다. 당시 부산 코모도호텔 대연회장에서 서울에 본사를 둔 교회연합신문(지금 기독교신문 제호 바뀜) 사장 장충협 장로와 45년 전 부기총 초창기 총무와 대표회장을 역임한 박선제 목사가 설교를 했다. 초대 이사장님과 명예이사장을 하면서 본지를 몹시도 아끼고 기도해 주시는 어른을 생각하면 그저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이후 김상권 장로도 이사장으로서 5년간 헌신했다.

처음 시작할 때 신문 제호는 ‘부산기독교신문’이었다. 제3대 이사장이었던 정동만 장로(온천제일교회 원로)가 ‘한국기독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해 전국적으로 확대해 보급하자는 제안에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분들의 헌신에 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삶 여정

나의 집안은 경남 고성읍에서 포목점과 양조장을 운영했다. 12형제 중 큰 형이 부산상고 1년 재학시절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에서 심판장인 일본인 노다이 대좌가 한국학생에게 편파적 심판판정에 불만이 고조되어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이 있었다. 일명 ‘노다이’사건에 연루되어 부친이 형의 제적을 면하기 위해 마산상고로 전학을 시켜 겨우 졸업했다. 부산상고, 지금의 개성고교에서 노다이 사건에 대한 기록물을 찾아보았으나 기록은 일본 교장 아래에서 많이 삭제되었다는 학교측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3명의 남형제가 마산에 유학을 가 마산고교 동문이 됐다. 나의 바로 밑의 동생은 육사 27기로 수석입학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제 많은 형제들이 세상을 떠나고 육형제만 남았다.

3대 부자가 없고 3대 거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부친의 병고로 일본 종교 일련정종에 재산을 바치고 이리저리 생활하다가 정든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와서 대신동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부친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부산에 정착했을 때에는 가산은 다 탕진한 상태였다. 이때 동생은 신문배달로 생활비를 보탰고 나는 교회연합신문 부산지사에 기자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1976년 여름, 그때부터 나는 교계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동생들과 한 방에서 도저히 생활할 수 없어 집을 나와 서구 충무동 하숙집 방을 얻어 생활하며 어렵게 지냈다. 그때 당시 아내를 만났고, 결혼 전에 처가의 밭농사일을 하면서 처가생활을 했다.

교계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학창시절에 다녔던 교회를 나갔다. 부산남교회(한명동 목사 담임)이었다. 통합 측 마산문창교회 김석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니까 통합과 고신에서 자랐다고 해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장측 부산중부교회 최성묵 목사 전도사 시절부터 10년 동안 나갔다. 1980년대 군부에 의해 통치했던 시절이라 민주화의 열망이 간절했던 재야인사들의 활동을 옆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기사는 나갈 수 없었다. 보도 검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차곡차곡 메모했던 것이 훗날에 도움이 됐다. 5.18사태를 경험한 세대였고 양서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고, 고인이 된 변호사 김광일 장로와 최성묵 목사, 임기윤 목사 등 많은 재야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당시 노무현 변호사, 문재인 변호사들의 재야활동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기자로서 취재를 빌미로 재야운동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눈여겨 본 산 증인 밖에는 별다른 공로는 없었다.

성경에는 욥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욥은 동방에서 큰 부자였다. 그의 신앙은 순전했고 하나님을 경외했다. 무엇보다도 악에서 떠난 신앙의 소유자이다. 어느 날 이런 욥을 사탄이 시험했다. 사탄이 욥을 첫 번째 시험은 그의 재산을 전부 빼앗아 그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두 번째 시험으로 욥의 열명의 자녀가 하루아침에 죽는 비극을 당한다. 사탄의 세 번째 시험은 건강의 시험이다. 욥은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욕창이 생겨 고통스러워했고, 기왓장으로 긁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욥을 본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다.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다. 욥이 믿음으로 시험을 이겼을 때 하나님은 갑절의 축복을 주셨다. 자녀도 재산도 건강의 복도 더불어 받았다. 욥이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했을 때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이다. 나는 욥의 행동과 믿음에 반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고성에서 부자로 살다가 부친이 다른 종교를 숭배하여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다시피 하여 부산으로 이주하여도 학창시절부터 믿었던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했다. 오늘날까지 믿음을 가지고 장로로 임직 받고 또 교계신문으로 한 우물을 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이 어찌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17세기 영국의 한 시인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남겼다. “신이시여! 당신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제게 한 가지만 더 주시옵소서. 오직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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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삶의 먹구름이 뭉게구름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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