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6-1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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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만남 가운데 종종 ‘에서’ 같은 들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때론 ‘야곱’ 같이 장막에 거하는 사람도 만난다. 분명한 것은 장막에 거하는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평행감축인데 들사람의 삶은 세월이 갈수록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선 것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지금은 은퇴를 해서 목회라는 단어가 추억이 되었지만 현역 목회시절에 기록해 둔 목회일기장을 열어 읽노라면 지난 목회사역의 상황을 추억하면서 눈물 짓기도, 미소 짓기도, 웃기도 한다. 임직을 받은 집사님 가정에서 감사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 그날은 시편 65:4절 말씀으로 축복한 날이 있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그렇다. 주의 뜰은 장막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도들이 자신의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으로 신학자들은 주석을 했다. 부디 직분 받은 후 그 직분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존귀함을 깨달아 에서처럼 들사람이 되지 말고 야곱처럼 장막생활을 통한 사명 잘 감당하기를 축복했다. 그는 장로가 되었고 지금도 말할 수 없는 축복받은 삶을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교회 생활, 즉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신앙생활을 액세서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들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런 경우는 이유 여하를 무론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들사람이 되지 말고 장막에 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교훈한다.

 창세기 25:27절은 에서를 가리켜 들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이다. 에서에 대한 표현방법이 아주 묘하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에서는 민첩한 기질로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사냥 업에 종사한 것을 의미하는 내용이다. 에서에 비하여 야곱은 장막생활을 즐거워했다.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 고로 장막에 거하니”라는 말씀의 장막은 구약에서는 두 가지의 의미로 씌어졌다. 장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명사 ‘오헬’과 ‘미쉬칸’이 있다. 오헬은 보편적으로 ‘천막’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미쉬칸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계된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장막의 생활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에서가 충동적이고 활동적이며 무절제의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야곱은 사리분별이 있었고 인내와 절제를 통한 영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 한 가지가 있다. 주님은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교훈하셨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의・식・주가 우선이 아닌 말씀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신앙적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자기의 방법으로 양식을 구하려는 몸부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들사람의 특징이다.

 에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축복권을 야곱에게 넘기며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참담한 말을 하게 된다. 왜 이지경이 되어 가는가? 하나님이 주신 명분을 경멸하고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업신여긴 것이다. 이것이 들사람의 특징이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 에서의 행동 원문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와야칼 와야쉐트 와야캄 와야라크’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먹었다. 그리고 그가 마셨다. 그리고 그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갔다’이다. 여기 ‘그리고’의 ‘와우’ 용법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에서가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생각할 여지를 두지 않고 일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의 ‘바자’는 ‘업신여기다’ ‘경멸하다’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명분은 관심도 없고 눈앞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생각 없이 행동하는 들사람의 모습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오늘도 주님의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들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들사람의 특징은 생각 없이 행동하는, 그래서 옳고 그름에 분별력이 없고 가치관의 의미가 결여되어 있으며, 삶의 의미를 육신적인 것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도 예외 없이 교회에서의 직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홀히 여기는 일이 다반사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주신 장자의 명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명분을 천하보다 귀히 여겼던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들사람과 장막의 사람의 차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절대적인 믿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초지일관의 바울 사도의 사명수행의 삶은 장막에 거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연주다. 그러나 들사람 데마는 세상이 좋아 세상으로 갔고, 들사람 가룟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의 종말을 맞이했으며, 들사람 고라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명분을 잃어버리고 모세를 대항하다가 저주받아 땅이 삼켜버리고 말았다. 모두 유다서에 기록된 저주받은 이름들이다.

 어찌 이들 뿐이겠는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들사람이 있고 장막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참 신자는 들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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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들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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