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삶의 현실에서 재조명하여 마치 “그렇게는 살지 말라”고 깨우쳐 주는 것 같다. 현실에 처해 있는 복잡한 문제가 직면해 올 때에 지나 간 역사를 되돌아보고 “아, 그 때 그랬구나!”라고 삶의 해설서처럼 다가온다. 지난날의 경험과 역사의 현장을 지켜온 50여년 세월 속에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부흥시켜 주셨다가 교만하거나 우쭐대면 삽시간에 흐트러지게 만드신다. 더구나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교회 성전도 마음대로 출입 못하게 하시다가 “분열 씨앗”으로 흩으신다. 스가랴 13장9절에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 이는 멸망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라고 했다, 너희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면 이렇게 흩어버리실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당면 문제는 무엇인가?
남태평양 작은 섬이 있다. 이 작은 섬에서 1946년~1956년 사이에 핵실험을 수없이 반복했다. 이 작은 섬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생태계가 파괴되다시피 되어 사람이 살 수없이 오로지 바다의 거북이만 살아가는데 이 거북이가 부화를 위해 육지 모래 속에 알을 낳아야 하는데 자꾸만 산 위로 올라가지 않는가? 방향감각을 잃어버려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역시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채 자꾸만 교인 모우고 대형교회 만들어 이익집단으로 혹은 거대한 ‘주식회사 교회’로 변질되는 모양새다. 영적 목양보다는 주식회사 교회를 어떻게 잘 운영할 수가 있을까에 집중되고 몰입되어 있다. 방향감각을 상실하며 헤매었던 1980년대부터 2020년까지 경쟁하여 교회 교인들은 개미 투자자고 담임목사는 회장이고 부목은 담임목사의 수행비서와 행정비서 역할을, 시무 장로들은 회사 중역으로 동거해 왔지 않았나? 아예 교회의 주인은 교회 권력과 명예를 가진 주식왕국의 왕 노릇하듯 해 오니까 세상은 교회에 대한 신뢰와 존경은 손톱만큼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교회마저 주식회사 운영하듯 예수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자기들이 주인이랍시고 경영을 하고 있으니 걱정이 앞선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했던 것이 내 교회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주인이다. 교회 전문가들은 이번 월간 목회 4월호에 기고한 글에는 ‘한국교회가 코로나19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정도의 위기 앞에 이 근본 원인은 방역 대책이 아니라 교회내부에 위기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외부의 문제보다는 이 대형교회(메가처치)에 물들어져 있는 맘모니즘에 종속되어 값싼 복음을 양산하는 장소로 전략되어 진 것이 첫째 원인이고, 둘째는 내부문제들이 교만과 이익 집단으로 매도당해 사회로부터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초대교회의 모습은 헐벗고 굶주려 있을 때만도 교인들이 갖다 준 성미로 목자와 가난한 양들이 먹고 살아오면서 영적 지도력을 잃지 아니했다. 같이 야유회로 갔을 때 교인이 독사에게 물렸을 때에 목사는 자기 입으로 독사의 독을 빨아내어 살려내는 영적 지도력을 갖고 살았다. 지금은 어떠한가? 럭서리 한 고급승용차에 건강을 위해 골프채를 휘둘려야 건강한 지도자 상이라고 자하자찬하고 있지 않는가? 셋째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윤리적 부패와 퇴행이라는 부메랑을 맞아 바닥에서 헤매는 꼴이 되고 말았다. 넷째는 세속적인 가치에 사로잡혀 지도자들이 재물, 권력, 명예에 사로잡혀 맥을 못 추는 세속적인 권위 의식에 노예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 더 보태자면 코로나19라는 감염병으로 인해 예배 본질도 잃고 교회가 세속 권력 앞에 저항정신과 예언자적인 메시지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한심한 꼴을 보고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 속에서 전통예배는 사라지고 예배의 본질은 무너져 버려 교회는 나눠지고, 합병내지 아예 교회 문을 닫는 현상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구책으로는 연합과 일치로 단합하여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상달될 때에 새로운 부흥의 역사와 제2의 사도행전을 쓸 수 있다는 희망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