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열심히 학교를 잘 다니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부모들은 대부분 느끼겠지만,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휴대폰 액정에 ‘아이 담임선생님’이란 문구가 뜨면 본능적으로 불안함이 밀려온다. “우리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나?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났나?” 등 발생하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의 나래를 펴며 미리 걱정한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어둡지 만은 않았다.
“은성이 어머니, 저 담임 ㅇㅇ선생님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무슨 일이 있나요?”
선생님이 별일 아니라고 운을 떼며 시작한 이야기는 실제로 선생님에게는 큰 일이 아니었지만 부모인 나의 입장에서는 아주 큰 일이었다.
추석을 앞둔 국어 시간이라 그 날은 ‘달과 소원’에 관한 내용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달을 크고 동그랗게 그린 다음에 음력으로 8월 15일이 되면 달이 엄청 큰 원이 되며 아름답게 빛난다고 알려주며 달에게 소원을 비는 우리 나라 풍습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펴게 한 다음 문제를 읽고 답을 쓰게 했다.
문제는 다음과 같이 나왔다.
“친구들이 이뤘으면 하는 소원이 있죠? 크고 둥근 달에게 소원을 말해보세요. 소원이 이뤄질 수도 있어요.”
문제를 읽고 1학년 학생들은 하나 둘 생각하며 자신의 소원을 책에 또박또박 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첫째 은성이는 쓰지도 않고 멀뚱멀뚱 담임선생님만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은성이에게 “너는 왜 안쓰고 있어? 소원이 없어?”라고 말하니, 아이가 “그게 아니라, 저는 쓸 수가 없어요”라고 말을 했단다. 그리고 뒤에 따라 오는 말이 선생님을 당항하게 했다.
“저는 교회 다니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달에게 소원 빌면 안돼요”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아이들을 가르쳐 온 선생님은 이 부분을 수많은 아이들에게 설명했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달에게 소원을 말할 수 없다고 한 아이는 우리 첫째가 유일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날 상황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선생님은 내게 “어머니, 제가 은성이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했는데도 결국 소원을 안적었어요. 만약, 오늘 은성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대략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만 알고 있으세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선생님과 통화를 마치며 그날 있었던 아이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첫째는 엄마가 A를 말하면 A라고 있는 그대로 믿는, 그런 아이였다. 집에서 아이들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을 읽을 때도 다른 아이들은 “이건 왜 그래요? 예수님은 왜 선악과를 먹었어요?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해요?” 등등 궁금한 것도 많고 의심스런 질문도 많은데 첫째는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편이다.
큰 아이를 불러 물었다. 큰 일도 아니고, 단순히 학교에서 달에게 소원을 적는 것인데 굳이 안 한 이유가 있냐고.
“엄마, 지난 주 집에서 예배 드릴 때 기억해요? 하나님 말고 다른 것들에게 비는 것은 다 우상이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우상숭배 하는 거 제일 싫어하고. 달에게 소원 비는 것도 우상숭배 잖아요. 나는 달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 할 수 없어서 소원도 안 적었어요.”
나름대로 신앙을 지키느라 애 쓴 아이의 모습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가, 융통성 없는 저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만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가 나름대로 자신의 신앙에서 갈등을 했고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신앙 선택의 기준이 집에서 함께 한 예배고 말씀이라는 것이 아이들을 가정에서 말씀으로 가르치려고 애쓴 나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물론,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아이에게 충분히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맛에 힘들지만 가정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린다. 아이들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수많은 선택 앞에 기준이 될 수 있는 가치가 형성되기를 바라며 힘들지만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말씀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