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1(화)
 
▲송시섭 교수(동아대 법대)
 자본주의는 역사상 오랫동안 존재하였던 ‘교환’이라는 개념을 ‘화폐’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교환’으로 대체하였다.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사적소유와 그에 기한 배타적인 향유,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민법상의 ‘소유권’, 그에 기한 헌법상의 ‘기본권’등을 그 바탕으로 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한편, 성경, 특히 구약성경은 오랜 기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위계질서’에 기초한 선형적인 구조를 이루면서 선택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에 반하는 인간의 우상숭배, 그에 따른 심판과 회개 그리고 돌이킴 등을 주제로 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이다.
위 둘을 결합한 이른바 ‘위계적 교환’은 베버의 말대로 ‘프로테스탄트’라는 독특한 공동체를 통하여 결합되었고,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되는 서유럽의 국가들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의 성장을 보면서 ‘소명의식’을 통한 ‘부의 축적’이 근대자본주의의 맹아였음을 베버는 간파하였다. 이는 개신교의 ‘합리성’, ‘청빈주의’가 자본주의와 친숙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연구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개신교는 자본주의와 친숙한 종교로서 인식되었고,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연결된 자유주의, 나아가 최근 전 세계를 휩쓰는 세계화, 그에 이은 신자유주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본주의화된 개신교와 친숙할지는 몰라도, 성경적인 가치와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괴리감의 원천은, 자본주의가 돈을 매개로 한 ‘교환’이라는 가치를 지향하는데 반하여, 성경은 공유와 협력을 통한 ‘순환’을 그 기본사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즉 성경은 ‘교환’이 대세인 사회보다는 ‘순환’이 주된 흐름인 사회,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사회의 변천과정을 ‘위계질서적 사회’나 ‘동심원적 사회’에서 ‘리좀적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은 원래 그 아이디어를 ‘스스로 뿌리이자 줄기를 이루는 식물의 덩이줄기모습’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는 중심과 주변이 구별 없는 무한증식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다. 리좀적 사회란, 초점을 ‘소수자’에 맞춘 것으로, 이들은 ‘평균적인 정상’을 기준으로 삼는 다수자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모색을 통해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수자들이 근대적인 ‘다수자’ 중심의 위계적 이분법을 깨고 수많은 다양한 중심들을 생성하며 접속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리좀적 체계를 형성한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현대교회에까지 확대적용해보면, 미래교회는 종전 성속을 엄격히 구분하고, 강단과 청중을 교환적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설교와 선포, 즉 위계적 이분법의 강단에서 벗어나서 종전 설교의 청중이었고, 때로는 교회내 다수의 결정에서 다소 소외되었던 소수자들(여성, 청소년, 새신자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이를 경청하는 나눔의 교회, 즉 리좀적 교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교회내에서만 주고 받는 교환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 전체인 몸을 도는 순환을, 수목형(tree)구조가 아니라 리좀형 구조를, 다수자가 아니라 소수자를 지향하는 방향으로의 시선의 전환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바로 초대교회가 꿈꾸던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재해석하여 우릴 낮은 곳으로, 소수자의 세계로, 쌍방의 교환을 넘어 온몸의 순환으로 초대하는 목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교회 내 온 지체가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상합하며, 교회 안팎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미래형 공유교회가 더 많이 등장하게 되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시내산]순환하는 교회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