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2(수)
 


신이건 장로.jpg

8월과 9월초까지 코로나19로 인해 매 주일마다 제한된 인원 수의 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번 한달포 주일은 정신없이 긴 장마와 태풍이 연이어 오는 바람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생활이 피폐해졌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우리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대면에서 비대면 언택트(Untact)으로 공동체의 교회는 교회대로 직장인들은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집에서 듣고 있다.

문화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상 생활은 공동체의 가정으로 축소되고, 가정에서도 개인으로 자기 방 안에 혼자(방콕) 갇혀 버렸다. 이것을 뉴노멀(New Nornal)시대라고 한다.

가만히 주일날 유튜브로 비대면 예배를 보고 있는데 그냥 편하고 듣기 쉽게 침대 위에 누워 듣고 “아멘”하는 태도가 과연 하나님을 향한 경건회로 거룩함을 보여주는 걸까? 이건 아니다 싶다. 거룩성이 상실된 예배의 본질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거룩성에 배치되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을 하나의 극작가의 스크린에 뜨는 영상에 지나지 않게 소홀해 지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해도 혼자만의 세상이 되어 갈수록 인간의 근원적인 바람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신에 대한 간절한 애절함이 묻어나도록 하지 않겠는가?

창세기 2장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으시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 말씀에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사랑의 공동체이자 예배의 공동체이다.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올수록 모이기를 피하는 습관에 길들이여 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절대 모이지 않는 것에 익숙해서는 안되고 습관화 되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핍박을 받고 억압과 세상권세로 부터 탄압이 와도 더욱 모이기를 힘써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역병을 핑계로 사람을 혼자 있게 만들고 혼자 있는 문화로 만든다. 마귀는 그 틈을 타서 막히고 혼자 있을 때 죄를 짓게 하고 죄의 굴레를 씌워 지옥으로 데리고 가려 한다. 그래서 하와가 혼자 있을 때(창세기 3:1~6), 당신이 혼자 있을 때(삼하11:1~5) 마귀가 찾아와 죄를 짓게 했다. 엘리야도 혼자 남았다고 생각할 때 탈진이 오고 해서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나(왕상19:4)? 심지어 예수가 광야 40일 혼자 금식할 때까지 마귀가 찾아와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하고, 성전에서 뛰어 내리고 자기한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유혹을 했다. 마귀는 온 세상 사람들을 혼자 있게 하기위해 흩어버린다. 코로나19 정은경 질병본부장은 “흩어져야만이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믿음의 세계는 이와 정반대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이승만 박사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라를 구하는 그 외침이 예언처럼 들리면서 강하고 담대해야 살아 갈 수가 있다.

정부당국은 코로나19를 교회가 촉발 된 원인인 것처럼 여론을 확산하지만 처음부터 중국 우한에서의 입국을 허용한데서 촉발 되고 확산된 정부 당국의 책임이 첫째 있다. 물론 일부 교회들이 방역을 소홀히 한 결과로 확산 시킨 점도 부인 못하지만 광화문 집회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 이전에 고 박원순 장례식에 서울 시민들의 2만명 가까운 조문객의 허용도 책임이 없다 할 수 없고 민주노총 집회에 모인 2천여 명에 대하여 왜 방역 전수는 하지 않고 넘어 가는가? 수많은 지하철 시민들 검사는 고사하고 면면한 서울 사랑제일교회 교인과 문재인 타도 광화문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만 전수 검사를 강요하는데 극성인가?

한국교회는 비대면 예배에서 대면 예배로 하루 빨리 전환해야 한다. 방역 수칙을 잘 지켜 나가면 얼마든지 질병으로 부터 예방되고 대면 예배로 드릴 수가 있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하고 목장에 모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기도해 줄 때 사랑의 예배 공동체가 활발히 전개 될 수 있다. 2천년전 역사가 증명한다. 로마의 말발굽아래서 교회는 오히려 단단하고 핍박을 받아도 복음은 더 멀리 전파 되었고 역병도 막아 내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세상 권력은 교회를 지시하거나 간섭하는 헌법 정신을 망각하는 행동을 거두어야 한다. 독일의 히틀러를 처음에는 지지했으나 나중엔 반 나치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8년간 수용소에 갇혔던 마르틴 니묄러(1892~1984) 개신교 목사는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는 “시”에서 표현했다. 얼마 전 고신교단의 부산 세계로교회 담임 손현보 목사는 “이런 코로나19 정국에 침묵하는 교단이라면 탈퇴하고 싶다”고 말로만 순교정신 운운하는 교단에 대해 의미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한국교회 온라인(비대면) 예배를 용납할 수가 없다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