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⑤
사진-신학(Photheology)의 사도: 세바스치앙 살가두
1. 빛을 쓰기
사진(photography)은 어원적으로 빛(photo)을 쓰는(graphy) 것이다. 따라서 사진작가는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세상을 쓰는 사람이다. 1944년 브라질의 작은 마을 아이모레스(Aimores)에서 태어난 세바스치앙 살가두(Sebastiao Salgado)는 젊은 시절 활동가로 브라질 군부 독재에 저항하다 결국 프랑스로 건너간다. 이후 파리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은행(WorldBank)의 아프리카 커피 산업에 대한 조사 프로젝트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 아내 렐리아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아프리카 출장 후 “경제리포트를 작성하는 것보다 사진 찍는 일이 더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진작가로 새 출발을 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이었다. 처음엔 뉴스 에이전시에서 작업을 할당 받기도 하고, 잡지 사진이며 누드 사진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요청받아 사진을 찍는 대신 스스로 주제를 정해 작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후 100개국이 넘는 나라를 여행하며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살가두에 따르면 사진은 ‘구도’와 ‘배경’, 그리고 ‘생동감’이 있어야 하는데, 생동감이란 피사체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의 감동 있는 이야기가 살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롤랑 바르트(R. Barthes)가 말한 풍크툼이다. <눈먼 투아레그족 여인>을 통해 살가두와 인연을 맺은 빔 벤더스 감독 역시 그의 작품에서 그 어떤 ‘화살처럼 꽂혀오는 강렬함’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살가두의 작품에서 인간 존재의 심연과 고통,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향한 절규와 그 응답인 빛을 보게 된다.
2. 인간이라는 흉악하고 끔찍한 짐승
‘사람을 아끼는 사진작가’라고 평가받는 살가두는 인간의 ‘욕망’과 ‘기아 문제’, ‘노동자의 치열한 삶’, ‘이주민들의 고통’ 등을 자신만의 뛰어난 관찰력으로 포착해냈는데, 그가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품은 브라질의 세라 펠라다(Serra Pelada) 금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에 대한 작품이다.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쓴 인부들, 황금을 찾고자 하는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탐욕과 원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이주 문제 역시 인간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임을 고발하는 증거이다. 따라서 살가두의 사진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죄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흉악하고 끔찍한 짐승”이라고 말하는 살가두의 담담하지만 비애에 찬 목소리와 표정은 보는 이들의 가슴에 무겁고 깊은 울림을 전한다.
따라서 지구촌 고통의 현장을 다니며 잔혹한 정치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의 모습 등을 렌즈에 담으며 마침내 증오가 증오를 낳는 인간 존재의 본성을 촬영하는 일에 회의를 느낀 살가두는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이주 문제 역시 인간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임을 고발하는 증거이다. 따라서 살가두의 사진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죄성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흉악하고 끔찍한 짐승”이라고 말하는 살가두의 담담하지만 비애에 찬 목소리와 표정은 보는 이들의 가슴에 무겁고 깊은 울림을 전한다.
따라서 지구촌 고통의 현장을 다니며 잔혹한 정치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의 모습 등을 렌즈에 담으며 마침내 증오가 증오를 낳는 인간 존재의 본성을 촬영하는 일에 회의를 느낀 살가두는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3. ‘나無의 신앙’과 신의 사도 살가두
고향에 돌아간 살가두는 부인 렐리아의 제안으로 브라질의 도체강 유역 아이모레스에 대지 연구소(Instituto Terra)를 세워 지역 생태계 복원작업을 주도하게 된다. 무분별한 벌목과 철광석 탄광 개발로 인해 황폐해진 지역에 나무를 심어 생태계를 복원한 것이다. “천국에서 태어났으니 이곳을 다시 천국으로 만들자”는 그의 말은 사진 작업에 있어서도 새로운 계기가 된다. 치유된 살가두는 이제 자연의 경이를 카메라로 포착한다. 지구의 경이로움에 헌사를 바치는 프로젝트 ‘제네시스’(천지창조)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며 치유가 되고 순환하는 삶의 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자란 이 땅에서 나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냅니다. 내가 죽은 다음 이 숲은 내가 태어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죠. 내 인생을 담은 순환의 고리가 완성되는 겁니다.” 인간은 대자연(신앙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나無) 자각이 있을 때 참된 신앙의 깊이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케노시스 기독론(자기비움의 그리스도)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11)
사람들은 사진기를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찍는 살가두를 보고 신께서 천국에 갈 인물을 찾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고 생각한다. 곧 신의 사도인 살가두를 이 땅에 보내어 사진을 통해 천국 갈 사람을 찾게 한다는 것이다. 끝없는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한줌 세상의 소금으로 내어주는 사람들을 신의 사도인 살가두는 자신의 사진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을 타자를 위해 비운 자만이 신의 사도가 될 수 있으며 그때 참다운 빛은 보여지고, 쓰여지고, 찍힐 것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부산대학교 문학박사, 부산대 윤리교육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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