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6(금)
 
 
크기변환_조조래빗 포스터.jpg
 
 
 
유대인의 영화사용법
유대인들은 영화사용법에 능통하다. 영화사 초창기부터 유대인들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사상을 갖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은 틈새를 이용 영화사들을 설립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영화를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할 뿐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세속적인 문화로 여긴 반면 유대인들은 새로운 대중의 오락거리로 등장한 영화들 속에서 일치감치 돈 냄새를 맡았었다. 획기적인 오락거리인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대중들은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고 적어도 TV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의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는 매체는 영화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는 영화공장으로 불리며 영화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미국경제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유대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유대인의 천재성은 영화의 상업성 뒤에 감춰진 지식의 전달력과 설득력과 같은 영화의 영향력을 일찌감치 간파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현대사의 변곡점을 이룬 두 가지 큰 사건에 연루되면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깨달았다.
하나는 러시아혁명으로서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 옆에는 영화의 혁명가로 불렸던 세르게이 미하일 에이젠슈쩨인(Sergei M. Eisenstein)이 있었다. 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던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이들 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었던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에이젠슈쩨인의 영화를 통해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식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2차 세계대전으로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 서있는 히틀러 또한 자신의 게르만 민족주의를 선전하는데 영화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피해당사자의 입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영웅적인 숭배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당시의 선전영화들은 ‘히틀러의 연인’이란 별명을 가졌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히틀러를 밀착 수행하며 촬영한 결과였다.
역사적인 이 두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영화로부터 얻은 지혜는 영화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최고의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루살렘 멸망이후 2천년 동안 세계를 떠돌며 냉대와 핍박의 세월을 살아 온 유대인들이 민족의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발명품은 그들의 말을 온 세상에 들려줄 수 있는 꿈의 매체 영화였다.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홀로코스트 영화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의 비극을 다룬 영화들은 유대인의 핍박받는 역사를 가르치는 중요한 교육도구의 역할을 해왔다. 유대인 출신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을 실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2차 대전의 실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실재 일어난 일이란 점과 아울러 학살당한 유대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전세계인이 공유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쉰들러 리스트>로는 부족한 실정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우주의와 이에 따른 인종주의적 행태는 반유대주의라는 망령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세상에 내밀게 만들었다. 2018년 미국 피츠버그의 유대교 회당에서는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11명이 사망했는가하면, 이탈리아 로마의 정치사회경제연구소(EURISPES)가 펴낸 ‘이탈리아 2020 보고서’에 따르면 이탈리아 국민의 15.6%는 홀로코스트가 실재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4년 같은 조사(2.7%) 때보다 6배로 급증한 수치다.
밀레니얼 세대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식은 더욱 희박하다. 2019년 1월, 세계 언론은 캐나다 젊은층의 62%가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통계를 보도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핍박받은 역사를 대중에게 알려왔던 영화전략에도 새로운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음이 분명하다.
이 때 유대인이 택한 영화는 <조조 래빗>이었다. 폴리네시아계 유대인 타이카 와이티티 (Taika Waititi) 감독의 영화 <조조 래빗>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 92회 아카데미의 현장에서 작품상을 포함 6개 부문의 후보에 오른 끝에 각색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최고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메디치 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었던 크리스틴 뢰넨스(Christine Leunens)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을 영화화 하는데 성공한 공로를 인정받으며 아카데미 최고의 영화 후보에도 올랐던 것이다.
<조조 래빗>은 학살의 잔혹성을 보여주며 이에 따른 유대인의 비극을 알려왔던 이전의 홀로코스트류의 영화와는 접근방법을 달리 한다. 홀로코스트 현장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만든 대중의 심리와 문화를 풍자적인 기법으로 만들었다. 홀로코스트 현장을 부인하는 시대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적 배경과 문화 그리고 인간심리를 묘사하는 일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감독은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2차 대전 중 히틀러를 추종하는 소년단인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열 살 독일소년의 심리를 유머있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빠 없이 엄마와 단 둘이서 생활하는 열 살 소년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히틀러 유겐트의 일원이 되어 군사훈련을 받지만 토끼를 죽이지 못하는 바람에 겁쟁이로 낙인찍히고 오히려 ‘조조 래빗’이라 불리며 놀림을 받고 만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는 철저히 히틀러를 추종하고 있고 소외된 조조 앞에는 상상 속 친구인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가 나타나 위로의 말과 더불어 히틀러가 주장하는 반유대주의 정신을 강화시키곤 한다. 어린 아이에게 군입이 입는 제복을 입고 히틀러 부대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은 히틀러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정신체계의 기틀로 작용한다. 오른손을 번쩍 치켜 올리고 ‘하일 히틀러’를 수없이 외치며 거리를 쏘다니는 조조의 모습에는 온전한 지식과 판단에 이르지 못한 결과로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연약한 대중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조는 2층 벽장 속에 숨어 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발견하고 갈등에 휩싸인다. 나치 친위대에 고발할 생각도 하지만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가 뜻밖에도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협력적인 동거를 택하고 만다. 이 때 나치즘에 흠뻑 빠진 조조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어머니 로지와 유대인 소녀 엘사라는 두 여성이 보여준 애정과 친밀감이다. 이들은 가족 간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조조를 조금씩 나치즘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특히 게시타포의 급습 때문에 얼떨결에 조조의 누나로 신분이 바뀌어버린 엘사를 보호하려는 조조의 모습에는 유대인과 나치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양심과 상식을 짓누르는 허황된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온전한 사랑은 변화의 핵심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라
영화 <조조 래빗>은 나치즘에 몰입한 열 살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 머리에는 뿔이 나있고 짐승처럼 꼬리가 있으며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고 믿는 주인공 아이의 모습은 과거 히틀러 독재 시대에만 있었던 생각은 아니다. 자신의 부조리한 권력과 잘못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치와 종교, 경제 가릴 것 없이 인간사회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온갖 거짓을 꾸며내어 희생을 정당화시키곤 했다. 다시 말해서 <조조 래빗>은 나치즘에 희생당하는 유대인의 특수적 상황을 세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실로 인식되게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코믹한 풍자를 내세워 거짓말하는 권력을 조롱함으로써 관객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조 래빗>이 어리석음과 사랑이 공존하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인간 성장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대단히 잘 만든 작품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구두끈을 묶는 장면의 반복과 변화를 통한 상징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조조는 자신의 손으로 구두끈도 매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엄마는 아들의 구두끈을 정성스럽게 매어주며 사랑을 표현한다. 그렇다. 세상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신발 끈을 매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누군가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잘못된 권력과 거짓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사랑의 끈을 매어줄 필요가 있다.
영화 후반부에 조조는 죽은 엄마의 구두끈을 묶어준다. 비밀리에 나치에 저항운동을 해왔던 엄마가 거리의 광장에서 처형당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조조는 뜻밖에도 엄마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 풀어진 엄마의 구두끈을 매어준다. 사랑의 환원인 동시에 조조가 엄마의 의지를 깨닫고 성장하는 순간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조는 벽장에 숨어 지내던 유대인 소녀 엘사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며 그녀를 세상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뜻밖에도 엘사의 신발 끈을 묶어준다. 그녀와 교감하며 함께 세상으로 나갈 만큼 성숙한 주인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또한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요13:14)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섬김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뿐만 아니라 교감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신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영화 속에서 구두끈을 묶는 손길도 이와 같다. 어리석고 연약한 어린 아이와 같은 행동양식으로 가득 찬 세상이 성장하고 변화될 수 있도록 사랑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일이 우리에게는 필요해 보인다.
 
강진구 교수.jpg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영화] 누구의 신발 끈을 묶어줄 것인가?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