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경험하는 부활절, 이젠 부활절이 주는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되새김질 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말씀의 부활이 없이는 안 된다는 점을 논하고 싶다. 말씀이 선포되지만 성도들의 삶이 안 바뀐다고 난리인 시대이다. 거꾸로 그럼 말씀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나는 바뀌었나? 만일 내가 안 바뀐 그 말씀으로 성도를 바꾼다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전 존재를 바꾼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하기에 유익한 말씀의 부활이 절실하다. 이번 부활절을 기념하면서 말씀의 부활을 외쳐 본다.
말씀 사역자라면 성경전체를 30분 만에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와 신구약 중간기,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서를 5분 정도씩 할애해서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그렇게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분 만에 성경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럼 어쩔 텐가... 훈련되지 않으면 버벅거리고 막상 지쳐서 포기한다.
줄이지 못하면 늘리지도 못하고, 늘어진 것을 줄이지 못하면 늘인 것도 허당일 수 있다. 교리와 신학은 죽을 때 까지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역사적 전통을 지켜온 바른 신학을 더 연구해야 한다. 그보다 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물론이고 성도도 동일하다. 짧게 핵심을 꿰고 있어야 한다. 이게 준비 안 되면 창조적인 스토리가 생기지 않는다. 거룩한 상상력이 전혀 일어 날수 없다.
그뿐인가? 성경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는지 알기위해 주도면밀하게 성경 각 권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서는 과거사건을 스토리로 전개하고 있다. 스토리를 정확하게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가서는 현재의 경험을 노래로, 시로 드러내고 있다. 거룩한 정서를 가지고 묵상해야 한다. 선지서는 미래에 일어날 기대를 설교로 메시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대는 영원한 현재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관통한다. 그러므로 시간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400년 침묵기에 일어난 역사를 알아야 복음서를 이해 할 수 있다.
400년 침묵기에 일어난 헬라와 로마 그리고 100년간의 이스라엘 독립기를 이해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열심당과 에세네 사람들과 율법,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하나님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히브리인에게, 로마인에게, 헬라인에게, 그리고 오고 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이야기를 꿰뚫어 설명해내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아무 퍼즐이나 하나씩 꺼내다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만다. 결국 횡설수설이 되고 만다. 성도들은 오리무중이다. 퍼즐 하나의 이야기를 아무리 잘 이야기해도 그 다음 퍼즐과 아귀가 맞지 않으면 꽝이다. 전체를 연결하여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다음에야 비로소 퍼즐의 오묘함이 드러나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순서를 잘 맞춰서 보여줘야 한다. 아무쪼록 어리바리 하다가 사역과 인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리에서 든든하게 사역하다가 주님 뵈옵는 일이 일어나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황홀하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하나님, 거룩한 쾌락과 희락의 세계로 이끄시는 그 하나님을 지루한 하나님, 따분한 하나님, 재미없는 하나님, 매력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감동과 충격을 주는 하나님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 반응 없고 대답 없는 하나님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안내자가 길안내를 잘못하면 해고되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로 자신을 부리는 일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금년 부활절에는 말씀사역자들 모두에게 말씀의 부활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종들이면 좋겠다.
말씀 사역자라면 성경전체를 30분 만에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와 신구약 중간기,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서를 5분 정도씩 할애해서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그렇게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분 만에 성경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럼 어쩔 텐가... 훈련되지 않으면 버벅거리고 막상 지쳐서 포기한다.
줄이지 못하면 늘리지도 못하고, 늘어진 것을 줄이지 못하면 늘인 것도 허당일 수 있다. 교리와 신학은 죽을 때 까지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역사적 전통을 지켜온 바른 신학을 더 연구해야 한다. 그보다 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물론이고 성도도 동일하다. 짧게 핵심을 꿰고 있어야 한다. 이게 준비 안 되면 창조적인 스토리가 생기지 않는다. 거룩한 상상력이 전혀 일어 날수 없다.
그뿐인가? 성경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는지 알기위해 주도면밀하게 성경 각 권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서는 과거사건을 스토리로 전개하고 있다. 스토리를 정확하게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가서는 현재의 경험을 노래로, 시로 드러내고 있다. 거룩한 정서를 가지고 묵상해야 한다. 선지서는 미래에 일어날 기대를 설교로 메시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대는 영원한 현재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관통한다. 그러므로 시간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400년 침묵기에 일어난 역사를 알아야 복음서를 이해 할 수 있다.
400년 침묵기에 일어난 헬라와 로마 그리고 100년간의 이스라엘 독립기를 이해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열심당과 에세네 사람들과 율법,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하나님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히브리인에게, 로마인에게, 헬라인에게, 그리고 오고 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이야기를 꿰뚫어 설명해내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아무 퍼즐이나 하나씩 꺼내다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만다. 결국 횡설수설이 되고 만다. 성도들은 오리무중이다. 퍼즐 하나의 이야기를 아무리 잘 이야기해도 그 다음 퍼즐과 아귀가 맞지 않으면 꽝이다. 전체를 연결하여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다음에야 비로소 퍼즐의 오묘함이 드러나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순서를 잘 맞춰서 보여줘야 한다. 아무쪼록 어리바리 하다가 사역과 인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리에서 든든하게 사역하다가 주님 뵈옵는 일이 일어나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황홀하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하나님, 거룩한 쾌락과 희락의 세계로 이끄시는 그 하나님을 지루한 하나님, 따분한 하나님, 재미없는 하나님, 매력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감동과 충격을 주는 하나님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 반응 없고 대답 없는 하나님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안내자가 길안내를 잘못하면 해고되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로 자신을 부리는 일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금년 부활절에는 말씀사역자들 모두에게 말씀의 부활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종들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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