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22(토)
 
남송우 교수.jpg남송우 교수(부경대학교)
 올 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는다. 부활절이 절기상 봄과 맞물려 있음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겨우내 죽은 듯 움츠리고 있던 생명들이 봄과 함께 되살아나는 자연적인 현상 속에서도 부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부활절은 연례행사처럼 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일 년에 한 번씩 경험하는 절기행사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활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음과 동시에 그 정신을 현재화하지 못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부활절이면 내가 죽은 이후에 나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후의 부활신앙만 확신하고 살아간다. 이는 반쪽짜리 부활신앙이다. 사후 다시 살아 날 것이라는 부활신앙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면서 부활신앙을 실천해 가야한다. 이러한 실천이 없으면 온전한 부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살아가지 못함으로써 비난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참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삶인가? 이는 어려운 신학적 논의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부활이란 단어가 지닌 근원적인 뜻만 잘 이해하면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사안이다. 부활의 사전적 의미는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남”이다. 이 단어 속에는 두 가지의 요소가 들어 앉아 있다. 하나는 죽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살아남이다. 죽음과 삶, 이 두 개의 사건이 함께 함축된 개념이 부활이란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핵심적인 의미는 부활은 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죽지 않고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절 하면 다시 살아나는 사안에만 관심을 주로 가졌지, 부활의 전제조건인 죽음은 강조하지 않았다. 부활이 지니는 원래적 의미의 핵심은 다시 살아나는 것 못지않게 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늘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부활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일상 속에서 부활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사후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부활 신앙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부활신앙을 경험하는 자라야 사후의 부활을 제대로 신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소위 부활 장이라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린도 교회에 명쾌한 논리로 설명하면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상한 사람이라고 강한 어조로 강변하고 있다. 이런 확신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자신이 부활의 본질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 증거이다. 매일 죽는 삶을 통해 사도 바을은 현실적으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매 순간마다 우리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비본질적인 “나”를 죽이고 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있는 진정한 “나”가 새롭게 탄생하는 부활을 경험한 바을이기에, 현실 삶에서의 부활을 토대로 사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 있게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비본래적인 “나”는 한번 죽음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무시로 되살아나서 우리를 괴롭힌다. 그래서 이 고통 속에서 사도 바을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외쳤던 것이다. 매일 매일 자신을 죽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매일 자신이 죽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매일 매일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확신하는 데 있으며, 그 확신을 실천하는 데 있다. 일년에 한번 절기로 지키는 부활절이 아니라, 매일 매일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매일 매일 부활하는 신자로 살아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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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부활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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