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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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변호사, 최성묵 목사와의 첫 만남
문재인 대통령은 1982년 8월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개업 무렵 재야의 고 김광일 변호사, 이흥록 변호사, 송기인 신부, 심응섭 목사, 임기윤 목사, 최성묵 목사 등을 중부교회 바로 앞 큰 대로변에 있는 유기선의원의 이층 원장실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사법연수원을 마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판·검사로 임용이 되던 시절이었으나 문재인 변호사는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변호사로 개업했다. 유신시대 학생 운동을 하며 구속, 재적됐던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때 부산은 부림사건과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는 상태로 시국이 민감하고 늘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개신교의 진보적 교단인 기장의 심응섭, 최성묵 목사와 통합의 박광선 목사, 감리교 임기윤 목사, 복음교단의 전병호 목사와 가톨릭의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 용기 있는 재야의 인물들이 민주화운동의 싹을 키웠다.
그 당시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와 집회의 중심은 부산 중구 보수동 소재 헌책방 골목에 있는 중부교회로 담임목사였던 최성묵 목사는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때 관의 억압과 탄압을 견딘 재야인사들이 민주화 운동 단체를 복원하고 서서히 논의하면서 모이기 시작한 것이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부민협은 부산에서 식어가는 민주화의 열기를 재생산하고 부산지역의 최초로 민주적이고, 통일적인 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태동된 단체로서 부산 민주화 운동의 지휘부 역할을 했을 만큼 그 결성은 대단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문재인 변호사는 그때 그 단체의 논의과정에서 참여한 막내였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을 끌어들인 인물이 김광일 변호사였다. 김광일, 이흥록, 문재인은 모두 경남 고교 출신으로 선, 후배 사이였다. 그 후로 부민협이 먼저 결성하자, 개신교에서는 부산NCC인권위원회, 민주헌법 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부산국본) 등의 활동을 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부산지역의 민주화운동의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대적 상황을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송기인 신부는 타의에 의해 미국에 유학을 떠나고 중부교회가 6월 항쟁의 본부로 역할을 했다. 1987년 고 이태춘 열사의 노제 때 부산 최초 6월 항쟁 가두시위에 노무현 변호사는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들었고, 그 옆에 문재인 변호사가 섰다. 고 최성묵 목사 바로 뒷편에는 황대봉 목사와 박찬종 변호사가 서서 거리로 나선 광경을 필자가 교계기자로 사진에 담고 직접 눈으로 체험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당시 상임위원, 인권위원, 상임집행위원 등의 직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이흥록 변호사는 김희욱 집사와 더불어 양서협동조합의 이사장, 총무일 맡았다. 문재인 변호사는 6월 항쟁이후 민족학교와 한겨레신문 창간에 후원회로 참가한바 있다. 고 최성묵 목사의 추모집 ‘그의 부활을 기다리며’ 속에 ‘6월 항쟁의 중심’이란 글을 통해 “돌이켜 보면 시대가 필요로 하였던 그런 일들을 그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나의 인생에서 크나큰 행운이었다”고 소회를 적어 놓았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서울이 아닌 부산이다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이란 목표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설정한 가운데 전국적인 연대 투쟁 기구를 결성하고 그 지휘부하에 사전 계획된 대규모 대중 집회 시위로 조직적으로 민중의 힘으로 전개했다. 강력한 군사 독재정권을 굴복시키고 목표를 쟁취함으로서 민중의 힘으로 세워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7년 2월 박종철 군의 사건에서 시작된 부산의 6월 항쟁을 이끌어 마침내 6.29선언을 받아내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6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부민협은 부산민주화운동의 산실로서의 역할이 컸다고 고 김광일 변호사가 훗날 자서전에 기록했다.
금요기도회 등 서울 등지에 중도 재야인사들을 초청했다. 집회 장소는 중부교회였고, 박형규 목사,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강원용 목사, 이문동 교수, 서남동 교수, 한완상 교수 등이 주요 강사였다.
그때 필자는 교계신문기자이자 중부교회 집사였는데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한 재야운동인사들의 활동을 현장에서 취재했던 산 증인이 되었다.
1975년 변호사 개업 당시 고 김광일 변호사는 ‘동아가 죽으면 나라가 죽고 동아가 살면 나라가 산다. 부산지방변호사회 변호사 김광일’이라고 격려 광고를 실었던 관계로 요산 김정한 선생, 노경규 선생, 임기윤, 최성묵, 심응섭, 유기선 장로들과 만났고, 가톨릭에서 송기인, 오수영 신부, 이홍록 변호사, 언론계에서 윤경규 국제신문 논설위원, 조갑제 기자, 김재규, 김희욱, 박상도, 김형기 목사, 고호석 등 민주운동의 대표적 인사들과 결집할 수 있었다.
고 최성묵 목사, 고 김광일 변호사가 만나지 못했다면 6월 항쟁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으로 필자는 진단하고 싶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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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은 부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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