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흘러갈수록 ‘복지’가 강조되는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살기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아직도 거동하기 불편한 현실이다. 아직도 계단은 많고 대중교통 이용하기도 불편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한 것은 여전하다. 교회도 이런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이에 맞춰 교단마다 장애인의 주일을 지키기도 하지만, 사실상 장애인의 주일을 지키는 교회는 드물고, 관심도 저조하다. 더구나 지금은 모든 관심이 ‘대선’에 쏠려있다. ‘대선’이라는 블랙홀 때문에 금년 장애인의 날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다.
부활절을 지내며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에게 귀천이 없는 것이 기독교의 사상이 아닐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성하지 못한 장애인들 즉 눈 멀고, 귀 먹고,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피부에 병이 난 장애인들을 위해 오시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장애현상을 친히 짊어지시고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병과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동자엔 하나님이 하실 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자신의 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강함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장애인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복지 정책을 내세운 후보들도 있다. 과거 장애인들을 위한 여러 정책들을 내세웠지만 과연 얼마나 지켜졌는지 의문스럽다.
태어나면서 장애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고나 질병 등으로 장애를 얻는 경우가 더 많은 세상이다. 장애인들을 나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웃으로 생각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나 또한 잠재적 장애인이란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랑, 나눔, 헌신을 강조하는 교회가 여전히 장애인들이 함께 하기엔 불편한 곳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들은 육체가 조금 불편한 장애를 가졌으나, 우리는 마음에 장애를 가진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섬겨야 하는데도 마음이 삐뚤어진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닐지 고민하고 고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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